
송영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심 재판 이후 보석으로 풀려난 지 8일, 여전히 그는 “도전과 희생”의 정치철학을 이어가고 있었다. 6월 23일 보석으로 석방된 그는 주요 혐의 중 ‘돈봉투 의혹’과 ‘특정범죄가중처벌법상 제3자 뇌물 혐의’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다만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 판결(징역 2년)을 받았으며, 현재 항소심을 준비 중이다.
송 전 대표는 전남 고흥 출신으로, 장사 체격에 굵은 목소리, 매일 백 개 이상의 푸시업을 한다는 강한 체력의 소유자다. 5선 국회의원, 인천광역시장, 그리고 거대 야당의 대표를 지낸 그는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으로 시작해 정치의 중심에까지 올라섰다.
그의 정치 인생은 ‘희생과 결단’으로 요약된다. 6선 의원·국회의장 도전 대신 서울시장 출마를 자청했고, 이재명 현 대통령이 자신의 지역구였던 인천 계양을에서 출마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는 정치적 결단도 마다하지 않았다. 필자와의 만남에서 그는 “정치는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보다 다른 이의 길을 여는 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고교생으로 목격하며 정의에 대한 감정을 키웠고, 연세대 총학생회장 시절 제적된 후 인천으로 내려가 위장 취업,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사법시험에 도전해 31세에 합격,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그의 장형 송하성 교수 등 일가 중 절반이 사법·행정고시를 통과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송 전 대표는 “깨끗한 정치인”으로도 널리 평가받는다. 재산 신고액 6억 원대, 24평 전셋집 거주, 세비 25%를 기부하며 ‘밥퍼’ 등 단체를 도운 일화는 유명하다. 특히 세계 평화를 위해 마라톤을 뛰는 강명구 씨에게 전세보증금을 올려주기 위해 모아둔 돈 일부 2천만 원을 선뜻 내어준 이야기는 인간적인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의 스승인 박석무 다산연구소장(전 국회의원)은 “정치인은 불의에 분노하고 정의를 위해 싸울 줄 알아야 한다. 송영길은 고2 시절 광주 대동고에서 교련 반대 시위를 주도했고, 1980년 광주항쟁 이후 친구의 죽음을 통해 실천의 정치를 시작했다”며 “오늘의 송영길은 예견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박 소장은 1979년 10월 26일 송영길이 주도한 시위 직후 학생과 교사 모두 처벌될 위기에 놓였으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이 발생하며 기소와 정학이 취소되었다고 회고했다.
송 전 대표는 4개 국어(한국어, 영어, 불어, 중국어)를 구사하며 외교 역량도 인정받았다. 2007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슈발리에’, 2022년에는 한 단계 높은 ‘오피시예’ 훈장을 받았다. 이는 국회의원 중 유일하게 ‘레지옹 도뇌르’ 2관왕이다.
그가 당 대표 시절 6년간 한불의원친선협회장을 맡으며 양국 관계에 기여한 공로에 대한 평가였다. 의원 시절 국제회의에서 북한 대표의 유창한 영어에 충격을 받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한 일화는 그가 ‘타고난 언어 천재’가 아닌, 노력형 인재임을 보여준다.
송영길은 오늘의 정치권에서 가장 저평가된 인물 중 하나로 불린다. 과거 김대중 대통령이 박지원 당시 비서실장에게 “미래의 대통령감”을 묻자, 박 실장은 초선 의원 중 송영길과 임종석을 꼽았다고 한다.
현재 1심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정치가 생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복귀 가능성을 섣불리 예단하긴 어렵다. 그는 조국, 김경수, 김동연 등과 함께 여권 내 차기 대선 주자군으로 여전히 거론된다. 다만 이재명 대통령과의 관계, 과거 인천 계양을 지역구 양보 등은 향후 정치적 재편과 ‘결초보은’ 가능성에서 주목받는 지점이다.
“신언서판에 능하고, 따뜻한 인간미를 지닌 인물. 그는 정치 거목이자 다시 주목받아야 할 공적 자산이다. ”박석무 소장의 평가처럼, 다시 무대에 오를 준비를 하는 송영길의 다음 행보가 기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