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중의 형님뻘 되는 엄기영 전 문화방송 사장이 어느 날 필자에 대해 진단하듯 짧은 글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그 내용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은, 책상머리에 무던히 닿아 있는 습관이 글을 쓰는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대목이었다. 곱씹어 보니, 정말 그 말이 맞았다. 말뚝에 묶인 소처럼, 필자는 평생 책상을 떠난 적이 거의 없었다.
중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작은 호마이카 책상을 선물해 주셨다. 그 책상은 처음으로 나만의 세계, 나의 개별성을 지켜주는 공간이 되어주었다.
사회로 나와 보니 책상은 단순한 가구가 아니었다. 책상은 지위였고, 권력의 상징이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책상은 그 지위만큼이나 크고 넓었다. 반면 필자의 책상은 작았고, 표면에는 전임자가 남긴 흠집이 남아 있었다.
문득 한 노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필자가 삼십대 중반이었을 때,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의 그 노인과 같은 사무실에서 일한 적이 있다. 그는 작은 철제 책상 앞에 앉아 하얀 백지를 펼쳐놓고 명상하듯 앉아 있었다. 마치 육중한 바위 같은 인상이었다. 싸늘한 파란 형광등이 비추는 넓은 사무실에서, 밤 12시까지 혼자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어느 날 왜 그러고 있느냐고 묻자, 그는 보고서에 쓸 내용을 구상한다고 했다. 필자에게 그 노인의 책상은 그의 수행처로 보였다. 그는 자신의 지위에 감사하며, 묵묵히 최선을 다해 일했다.
그 직장에서 알게 된 한 공무원이 있었다. 필자가 팀장이라면, 그는 팀원쯤 되는 위치였다. 어느 날 그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형님이 조직을 나가고 난 뒤, 어느 날 출근했더니 제 책상이 없어진 겁니다. 허전한 느낌이 밀려왔죠. 직접적으로 나가라는 말은 없었고, 대신 교육 명령이 내려졌어요. 그런데 그게 교육이 아니었어요. 봉사라는 명목으로 동물원에 배치되었고, 거기서 고릴라 우리를 청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죠. 그 냄새는 정말 끔찍했어요. 그걸 다 참아내고 나서야 제 책상을 되찾았습니다. 결국 1급까지 올라가 큰 책상을 갖게 되었어요.”
이처럼 책상은 단순한 물건 그 이상이었다.
필자가 법대에 입학했을 무렵, 고시에 합격한 선배들이 찾아와 우리에게 성공 비결을 전해주었다. 한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고시공부라는 게 별거 아니더라. 결국 책상 앞에 얼마나 오래, 끈질기게 붙어 있느냐의 싸움이었어. 머리 좋고 재능 있는 게 아니라, 앉아 있는 힘이었지.”
또 다른 선배는 사법고시 수석 합격자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찌는 듯한 여름이었어요. 스님들처럼 무문관 수행하듯 절대 책상을 떠나지 않겠다는 각오로 공부했죠. 그런데 어느 날 궁둥이가 이상한 거예요. 땀에 살이 짓물러서 팬티 섬유와 하나가 되어버렸죠. 병원에 실려갔더니 의사가 섬유 조각을 살에서 하나하나 떼어내더군요.” 사람들은 그를 천재라고 불렀지만, 그 뒤에는 독한 노력과 고통이 있었다.
또 다른 선배는 수재로 이름난 인물로, 필자가 상관으로 모신 적도 있었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 책상을 잡아놓고 공부했지. 고시에 합격하기 전까지는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절대 책상에서 벗어나지 않겠다는 각오였어. 공부할 때 나도 모르게 몸이 좌우로 조금씩 흔들리곤 했지. 옛날 선비들도 그렇게 몸을 움직이며 사서삼경을 읽었잖아. 그렇게 오래 앉아 있다 보니 셔츠가 의자에 쓸려 올이 나가고 구멍이 났어. 고향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빨래하면서 그걸 보고 울더라구.”
사람들은 흔히 책상물림을 우아한 백조처럼 본다. 그러나 물밑에서 쉼 없이 발을 놀리는 백조의 고통과 고된 움직임은 모른다. 재능이라는 금수저로만 단정 지어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에디슨이 말했듯, 천재는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필자의 할아버지는 책상 앞에서 공부하는 손자의 뒷모습을 그윽하게 바라보셨고, 늙은 어머니는 책상 앞에서 글 쓰는 아들을 보며 “이제 좀 놀아라”고 말씀하셨다. 세월이 흘러 필자는 책상이 되었고, 책상은 필자의 득음바위가 되었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창가에 놓인 책상은 필자의 낙원이다. 책상 앞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