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르 프로젝트의 첫 일정이 시작됐다. 연해주 아르죰에서 파르티잔스크(러시아어로 Партизанск, ‘빨치산스크’)로 이동하는 날. 마치 군대 병영처럼 우중충한 호텔에서 짐을 꾸려 복도로 나와 삐걱거리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두 사람이 겨우 탈 수 있는 작은 엘리베이터는 답사 내내 바뀌지 않았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가진 러시아에서, 어쩌다 엘리베이터는 이렇게 작게 만들었을까.

연해주의 첫날, 아침부터 굵은 비가 쏟아졌다. 현지 활동가 A가 운전하는 러시아산 밴형 트럭 ‘라다(LADA)’를 타고 이동을 시작했다. 힘은 좋고 단단했지만 편리함이나 쾌적함은 고려되지 않은 차량이었다. 수동식 6단 변속기와 아날로그 계기판, 라디오조차 없는 단출한 내장. 과연 이 차로 이 거대한 지역을 다닐 수 있을까.
아르죰에서 파르티잔스크로 향하는 도로는 표지판 하나 없이 울퉁불퉁하고 끝이 없어 보였다. 도로 양옆 숲은 바다처럼 짙은 녹음을 품었고, 평원은 대양처럼 지평선이 보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마주치는 차량 외엔 사람도, 마을도, 흔적조차 없다. 이 광활한 대지의 주인은 누구인가.

우리는 유격대의 성지라 불리는 파르티잔스크 시로 향하고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쪽으로 약 170km 떨어진 이곳은 연해주에서 보기 드물게 평야와 산악이 함께 어우러진 곳이다. 이 지역은 시호테알린 산맥(1,045km)의 남단이자, 시베리아 호랑이의 마지막 보금자리이기도 하다. 역사 기록에는 러시아어로 수찬(Сучан)이라 표기돼 있으며, 한국 독립운동가들은 이를 ‘수청(水淸)’이라 불렀다.

‘파르티잔(Partizan)’은 본래 프랑스어에서 유래한 용어로, 비정규 민간 군사조직이나 게릴라, 레지스탕스를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선 ‘빨치산’이라는 말이 ‘공산당’이나 ‘빨갱이’로 인식되곤 한다. 지리산과 백두산의 기억 때문이다. 하지만 연해주와 만주의 산악지대를 기반으로 한 독립군의 무장투쟁 역시 본질적으로는 파르티잔 방식의 유격전이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일본과 제정 러시아는 극동에서 손을 맞잡고 고려인의 무장 항일투쟁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1918년부터 1922년까지 내전이 벌어지며 상황은 달라졌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제정 러시아의 황제파와 레닌 중심의 혁명파가 내전에 들어가자, 많은 고려인(1864년 이후 조선에서 이주한 이들)은 혁명파를 지지했고 항일 무장투쟁도 다시 가능해졌다.
일본은 황제파를 지원하며 7만 명의 일본군을 연해주에 파병했다. 이에 따라 혁명파와 고려인 독립세력은 공동의 적을 맞아 항일전선을 구성할 수 있었다.

이 시기, 일본 육사 출신의 김경천 장군이 연해주에 잠입한다. 파르티잔스크 시 니콜라예프카(신영동) 지역에는 고려인 정착촌이 여러 곳 있었고, 김경천은 무장투쟁이 허용된 이곳에서 군사고문으로 초청된다. 당대 뛰어난 유격전 전문가였던 고려인 출신 소련군 장교 한창걸도 함께했다. 산악에 둘러싸인 지형은 유격전에 유리했고, 평야지대의 정착촌들은 병력과 군자금을 지원하는 중요한 기반이 됐다.
김경천은 1920년 6월, 고려인 정착촌을 습격한 만주의 마적 300명을 격퇴하면서 ‘백마 탄 김 장군’의 명성을 얻는다. 그가 러시아 땅에서 처음으로 승리를 거둔 장소이며, 이후 군정 책임자가 된 지역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스쩨끌랴누하에는 고구려의 후손 대조영이 세운 발해의 성터가 남아 있다. 발해 유적은 연해주 정부에서도 역사적 의미를 인정해 표지판과 안내 난간이 설치돼 있다. 연해주에서 민족이나 조국을 직접 언급하는 것은 여전히 금기시되지만, 이 발해 유적만은 예외였다.
답사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었다.
“이 광활한 땅을 선점했던 고구려와 발해는 왜 사라졌고, 한민족은 왜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채 반도 안에 머물게 되었는가?”

늦은 오후, 우리는 파르티잔스크 브로브니치 마을에 도착했다. 고려인 2세인 석 다마라 여사(69)의 러시아식 목조 주택에서 민박을 하게 됐다. 그녀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부모 아래에서 태어난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이며, 소련 해체 이후 연해주로 다시 돌아온 이주자였다.
그녀의 집은 천연가스 난방, 온수 샤워, 접이식 침대까지 갖춘 비교적 쾌적한 농가였다. 창고에는 한국 사업가가 두고 간 공업용 미싱 수십 대가 남아 있었고, 남편은 한국에 나가 일하고 있다고 했다. 인터넷 속도가 느려 불편했지만, 그 외에는 위생과 생활 환경 모두 만족스러웠다.
1864년 이후 조선인들은 기아와 수탈을 피해 연해주로 건너왔고, 1937년에는 17만 명이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후 소련 붕괴로 인한 민족 차별을 피해 다시 연해주로 돌아오거나, 한국으로 이민 간 경우도 많았다.
그들의 민족 이동사와 얽히고설킨 인생 유전에 관심을 두고, 연해주와 한국 양쪽에서 정착 운동에 힘쓰는 이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