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엄상익 칼럼] ‘변호사’ 제대로 하기…한승헌처럼 조영래처럼

손잡고

25년 전쯤, 여름이었다.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더운 날씨였다. 나는 부산구치소 구석의 컨테이너 안에서 벌거벗은 채 쇠사슬에 묶인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감옥을 탈출한 후 몇 년간 신출귀몰하게 도망다니다가 붙잡힌 상태였다. 그런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도망 다니는 동안 뼈도 부러지고, 머리도 터지고, 총도 맞고 별의별 고비를 다 넘겼어요. 어릴 때부터 학대를 받아서 그런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그런데 못 견디겠는 건 정신적인 거였어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내 이야기를 보면, 나는 사람이 아니라 악마더라고요. 형이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게 민주주의라면서요? 범죄 사실은 기소 전에 공표할 수 없게 되어 있다면서요? 그런데 수사기관은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겁니까? 언론은 내 말 한마디 듣지 않고 마음대로 악마로 만들어도 괜찮습니까? 힘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세상에 바른말 좀 해주세요. 그게 진짜 변호 아닙니까.”

그는 탈주범으로서 세상에 바른말을 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악마가 아니라 자신도 인간이라는 걸 말해달라는 것이었을까.

그를 변호해 달라고 부탁한 이는, ‘대도’로 불리던 상습 절도범이었다. 그는 자신도 감옥에서 탈주한 적이 있었고, 잡히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했었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그로부터 3년 전, 꽃샘추위에 수은주가 영하로 떨어지던 어느 봄날이었다. 그는 장기수로 징역 30년째를 살고 있었다. 처음 마주한 순간, 그는 내게 엉뚱한 질문을 했다.

“변호사법 1조에 보면, 변호사는 인권 옹호와 사회 정의를 위해 일한다고 나와 있는데요, 인권 옹호는 변호하는 일인 것 같고… 그렇다면 사회 정의는 뭡니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는 걸 의미하죠?”

그 질문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그는 감옥 안에서 밤에 끌려가 맞아 죽고, 인근에 매장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울었다. 인간이 개처럼 맞아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마치고 그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

“저 같은 놈은 어떤 말도 할 자격이 없어요. 영원한 나쁜 놈이니까요. 그게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그래도 저 같은 놈의 말이라도 변호사에게 전해지고, 그게 사실로 확인되면 뭔가 달라지지 않을까요? 뱀 같은 제가 말하면 독이 되지만, 변호사님이 그 불법을 폭로하면 사회 정의가 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변호사들은 업무상 비밀 보호라는 개똥 같은 명분 뒤에 숨어 불법과 부정을 외면하죠. 저는 평생을 감옥에서 살아온 놈입니다. 나갈 생각도 없고, 판사에게 절대로 사정하지도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는 변호사가 필요 없는 사람입니다. 대신, 사회 정의를 위해 맞아 죽은 한 인간의 억울한 죽음을 세상에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탈주범이나 대도의 그 말은 가볍게 넘길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건, 처절하게 몸으로 깨달은 정의였다. 내가 자주 들르는 변호사회관 입구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정의의 붓으로 인권을 쓴다.

한승헌 변호서 저 <법과 인간의 항변>

왜 ‘입’이 아니라 ‘붓’이라고 했을까. 의문이었다. 독재 시절, 민주 투사들에 대한 재판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변호사들은 글을 써서 세상과 역사에 기록으로 남겼다. 글 때문에 수차례 감옥에 간 한승헌 변호사가 있었다.

노동자의 예수로 불리며, 분신이라는 십자가를 진 전태일의 죽음을 평전으로 쓴 조영래 변호사도 있었다. 그 시절, 변호사의 무기는 글과 기록이었다.

나는 그 탈주범을 변호할 때, 한 방송에 출연한 적이 있다. 매스컴을 통해 ‘인간이 개보다 못한 취급을 받아선 안 된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그런데 사회자는 이렇게 말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고 죄상이 명백한 탈주범은 변론의 여지도 없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엄 변호사님의 태도는 범죄를 미화하고 스타 범죄자를 변호함으로써 명망을 얻으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도 있는데요?”

세상은 나를 ‘공명심에 들뜬, 별 볼 일 없는 변호사’로 몰아갔다. 선입견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나는 인간은 누구든지 잠재적 죄인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은 절대 그렇지 않다며 선민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잔인했다. 죄인을 죽여야 할 벌레쯤으로 여겼다. 말로는 피해자를 생각하는 척하지만, 동정심도 느껴지지 않았다. 조롱과 비웃음, 놀림은 오히려 내가 깨어나는 데 귀중한 자극제가 되었다.

인도의 간디 변호사가 마부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기차에서 쫓겨난 뒤 각성했듯,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됐다. 나는 변호사이자 글쟁이가 되기로 결심했다. 내가 직접 쓰지 않으면, 언론사나 타인의 렌즈를 통해 진실이 왜곡되기 때문이었다.

돌아올 대가는 십자가라는 것을 각오했다. 겁주는 이가 있으면 “벌 받지, 뭐”라고 했다. 소송을 걸어온 사람에게는 “집을 날리면 되지, 뭐”라고 응수했다. 여러 번 조사도 받고, 위기도 많았다. 메이저 신문 사회면 톱기사에 내가 ‘소송을 가장 많이 당한 변호사’로 보도되기도 했다.

지금은 그런 일들에서 한발 물러나 바닷가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다. 요즘 들어 새삼 깨닫는 게 있다. 위험에 처할 때마다, 내가 믿는 그분이 나를 지켜주셨다는 것.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엄상익

변호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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