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일흔 살 너머 지난 삶 되돌아보니…”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들이 대학을 다닐 무렵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그가 내게 불쑥 이런 말을 건넸다.
“나는 요즘 할머니와 외할머니를 유심히 살펴봤어요. 할머니는 학교를 많이 다니지 못하셔서인지 말수가 적고, 조심스럽게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요. 말은 적지만, 듣는 동안 많은 걸 배우시는 것 같아요. 알아듣지 못하는 척하시면서도 사실은 다 듣고 계시더라고요. 인품이 참 괜찮은 분 같아요. 반면 외할머니는 명문 고등여학교를 나오신 자부심이 크신 것 같아요. 몸이 아프시거나 힘드셔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참으세요. 늙으면 다리 아픈 건 당연한데도 그걸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쓰세요. 마치 피가 철철 나는데도 ‘난 하나도 안 아파’라고 말하는 스타일 같아요.”
아들은 두 할머니의 성격과 삶의 태도를 꽤나 예리하게 꿰뚫어 본 듯했다. 그의 말 속에는 서로 다른 두 분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담겨 있었다. 어머니는 어려웠던 시절의 이야기를 잘 숨기지 않는 편이셨다. 일제강점기 가족들이 유랑농민으로 만주까지 가셨던 이야기를 담담하게 들려주셨다. 어린 시절, 아버지 등에 업혀가던 길에서 어머니의 등짐에 매달린 바가지가 평생 뇌리에 각인되어 있었다고 했다. 용정의 이집 저집을 돌며 불쌍하다고 감자를 얻어먹은 일도, 일곱 살 무렵 가난 때문에 남의 집에 팔려가 갓난아이를 업어 키웠던 일도 솔직하게 들려주셨다.
그러면서도 배움에 대한 갈망이 컸던 분이셨다. 저고리 섶에 글자가 적힌 종이쪽지를 숨겨두고 틈틈이 꺼내 외우셨다. 명문 고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며 아쉬워하셨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이야기들을 들으며 그 시절의 세상이 다 그런 줄로만 알았다.
같은 해 한반도에서 태어났지만, 장모가 살아온 세계는 사뭇 달랐다. 장모는 지방의 부유한 사업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릴 적 사립 소학교에 다녔다. 경성으로 유학을 와서 당시 최고의 명문이던 경기고녀(현 경기여고)에 응시했다고 한다. 시험을 보러 올라온 날, 장모는 아버지와 함께 반도호텔(당시 최고급 호텔)에서 묵었고, 빨간 양탄자가 깔린 그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경성 거리를 구경했다고 들었다. 식사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했다. 장모는 좋은 환경 속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듯했다. 결혼도 아버지의 주선으로 일본 명문대를 나온 고위 관료와 이뤄졌다. 남편은 넓은 땅을 소유한 지주의 아들이었다. 처가 쪽에는 의대를 졸업한 의사들이 많았고, 의과대학 학장부터 군사정권 시절 장군까지 다양한 인물이 있었다. 환경이 다른 두 집안이 나의 결혼을 통해 하나로 연결되었던 셈이다.
결혼 후 처가를 오가며 나는 양가의 인식과 문화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결혼 전, 나는 아내를 데리고 상계동의 빈민촌으로 갔다. 당시 가장 가난한 이들이 밀려와 살던 지역이었다. 수백 명이 하나의 공동변소를 쓰는 곳이었고, 숙부가 그곳에 살고 있었다. 숙모는 리어카를 끌고 거리로 나가 노점상을 하셨다. 우리 집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난이 대물림되는 현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아내와 처가에 이 결혼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었다. 나는 눈치를 보며 연기할 능력이 없었다. 있는 그대로 드러내고 사는 것이 가장 편하다고 여겼다.
결혼식 무렵, 장모가 강남의 아파트를 살림집으로 마련해주겠다고 했다. 장모와 단둘이 만났을 때, 나는 내 가정은 나의 성(城)이니 함부로 개입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말아 달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어리다고 사위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무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말했다. 결국 장모가 제안한 아파트를 고사하고, 나는 달동네의 작은 쪽방을 얻었다. 그곳이 나에겐 낙원이자 출발점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어떻게든 인생을 나름대로 잘 살아온 것 같다. 20대부터 70대까지 내가 벌어 가족을 먹이고, 자식을 가르쳤다. 아내도 내 곁에서 성실히 도와주었고, 부모님도 모셨다. 모든 게 행운이었고 감사한 일이다. 나는 처가로부터 도움을 받는 사위가 아니라, 도움이 되는 사위이고 싶었다.
교회나 성당에 가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형상을 마주한다. 피를 흘리며 벌거벗은 모습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그곳에서 나는 ‘아무것도 감추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는 강한 메시지를 느낀다. 지금 이렇게 내 마음 한 조각을 글로 남겨두면, 언젠가 아들이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작은 단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