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벌써 오래 전, 2012년 7월에 나는 이런 글을 남겼다.
“지난 연초, 김지하 선생님께 전화를 드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선생님은 웃으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형, 나더러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 내가 빨갱이면 그 사람들은 도대체 뭐야.’ 그 말씀을 듣는데, 가슴 한켠이 뭉클해졌다. 김지하 선생님에게 ‘빨갱이’라고 말할 자격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 사형선고를 받고 무려 7년을 감옥에서 보내며 시대의 부름에 응답한 이가 또 얼마나 되는가. 민주화운동을 살짝 스치기만 하고도 도의원이 되고 국회의원이 되어 ‘나만큼 민주화운동한 사람 나오라 해봐’라고 자부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말이다.”
한 번은 김지하 선생님과 함께 경기도 이천시 설성면 수산리에 있는 앵산을 오르기 위해, 이천의 한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적이 있다. 그날 밤, 선생님은 무슨 생각이 드셨는지 조용한 어조로 내게 물으셨다.
“신형, 경원(敬遠)이라는 말을 아시오?”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왜 사람들은 멀리서만 나를 바라보는지… 가까이 다가오는 이가 없네.”
그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씀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자꾸 생각나, 지금도 눈시울이 뜨거워질 때가 많다.
며칠 전, 김지하 선생님의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의 인터뷰 기사를 어느 신문에서 읽었다. “어머니 박경리, 김지하를 사위로 삼은 것이 불행의 시작이었지만…”이라는 제목의 기사였다. 그 중 이런 구절에서 옛 기억들이 불쑥 되살아났다.
“민주화운동에 헌신했으나 병들고, 빛도 못 본 채 간 사람들이 참 많다. 그런 이들을 존중해야 하는데, 야심가들이 앞장서 세상을 오도하고 시끄럽게 만든다. 언제나 혁명 뒤에는 시커먼 야심가들이 있었다. 순수한 이들이 죽거나 숙청되면 그 열매는 늘 다른 사람들이 따먹는다.”
그런 일이 어디 민주화운동에만 있었던가. 문화운동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수많은 일들은 그렇다 쳐도, 오랜 세월 온몸으로 걸어온 ‘강’이며 ‘길’을 주제로 한 여러 활동들조차, 이제는 돈과 명예가 되겠다 싶으니 누군가는 자리를 차지하고, 나는 그 곁에도 가기 어려운 신세가 되었다.
사람들을 빛내기 위한 일이 아니었다. 강과 산, 옛길을 더 많은 이들이 걷고 이 땅을 조금이라도 더 알게 하자는 마음이었을 뿐이다. 그렇기에 서운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가끔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내 안에 오래 묵은 짐을 아직도 다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세상이란 그런 것이다. 일하는 사람 따로 있고, 그 열매를 따는 사람 따로 있다는 건 예나 지금이나 진리 아닌가.
우리 시대의 지식인이자 사상가였던 김지하 선생님조차 그렇게 소외받는 세상이다. 나 같은 이는 그에 비하면 한참 약한 존재이니 어쩌겠는가. 내려놓자. 더 많이 내려놓자. 그리고 다시 세상을 걷자. 묵묵히, 또 묵묵히.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고, 김지하 선생님은 작년에, 김영주 선생님은 그 전해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 선생님의 기일이 지나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우연히 선생님의 시 ‘난(難)’과 사진을 다시 보고, 옛 추억들이 떠올랐다.
선생님, 내세에서는 부디 평안하신지요. 선생님께서 잠시 머물다 가신 이 세상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 5월이 가고 곧 6월이 오겠지요. 이제는 간절한 기다림조차 없이 맞이하고 흘려보내는 세월입니다. 과연 언젠가, “있는 그대로가 내 마음에 드는구나”라는 <파우스트>의 한 구절처럼, 사람이 살 만한 세상은 올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