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칼럼

[윤재석의 철학자 도장깨기] 칸트와 피히테

칸트

전방위 철학자 칸트

근‧현대 서양철학의 최고봉을 꼽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17241804)다. 그는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으며, 독일 관념철학의 기반을 확립한 프로이센(18세기 초20세기 초 독일 북부에 존재했던 제국)의 대표적인 철학자다.

칸트는 처음에 라이프니츠-볼프 학파의 합리주의를 연구했으나, 이후 영국의 경험주의 영향을 받아 영혼, 우주, 신, 자유 등에 관한 전통 형이상학에 회의를 품고 양자를 비판적으로 종합한다. 그 결과 그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불리는 사상적 혁신을 일으켰으며, 인식론, 형이상학, 윤리학, 미학은 물론 수학, 물리학, 종교학 등 철학 전 분야에 걸쳐 깊은 족적을 남겼다.

칸트는 사망한 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근‧현대 철학의 중심인물로 평가받는다. 그의 영향력은 18세기 근대 철학에 국한되지 않으며, 현대 철학 전반에도 깊이 스며 있다. 특히 칸트의 윤리학은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와 함께 현대 윤리학의 두 축으로 불린다.

그는 21세기 철학에까지 영향을 끼친 폭넓은 관점을 창조했다. 인식론을 다룬 대표 저서 <순수이성 비판>은 이성이 지닌 구조와 한계를 분석한 고전이다. 이 책에서 칸트는 전통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비판하고, 자신이 기여한 점을 뚜렷이 드러냈다.

그의 만년 저서 중 윤리학을 집중 조명한 <실천이성 비판>과 미학 및 목적론을 다룬 <판단력 비판>도 철학사의 중요한 이정표다.

칸트는 종래의 경험론과 독단론을 극복하고 비판철학을 수립했다. 그는 인식과 실천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 형식에서 찾았으며, “사유가 존재를 규정하고 방법이 대상을 결정한다”고 주장했다. 도덕의 근거는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에 있으며, 완전히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이 도덕률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도 철저히 합리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이로 인해 공공 당국으로부터 여러 제약을 받았다. “모든 말이 참일지라도 모든 진리를 항상 공공연히 말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발언 이후, 정부는 그에게 종교 관련 강의와 저술을 금지했다. 그의 저서 <종교 안에서의 단지 이성만을 기준으로 한 종교>는 금서 목록에 오르기도 했다.

고향을 끔찍이 사랑한 사상가

칸트는 프로이센의 상업 도시 쾨니히스베르크(현재 러시아 칼리닌그라드)에서 수공업자 아버지 요한 게오르크 칸트와 어머니 아나 레기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례명은 ‘에마누엘’이었으나, 히브리어를 공부한 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의 ‘이마누엘’로 바꿨다.

그는 고향을 너무도 사랑해 평생 단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여행한 적이 없었다. 청교도 경건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자란 그는, 헌신과 겸손, 성경의 문자적 해석을 강조하는 신앙 속에서 성장했다.

1740년 쾨니히스베르크대학에 입학해 신학, 철학, 수학을 공부한 그는, 이후 자연과학에 흥미를 느껴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깊이 매료됐다. 아버지의 사망으로 집안이 기울자 가정교사로 생계를 이어가며 학업을 계속했다. 1755년에는 《일반 자연사와 천체이론》이라는 자연과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이라는 철학 논문으로 강의 자격도 얻었다.

이후 그는 대학에서 일반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 등 다양한 과목을 강의했다. 1756년 스승 마르틴 크누첸 사망 후 교수직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고, 1764년 프로이센 교육부가 제안한 문학 교수직도 거절했다. 에어랑겐, 예나, 베를린대에서 교수 초빙 제안을 받았으나 모두 고사했고, 결국 1772년 모교에서 철학 교수로 임명됐다.

칸트는 “서양 철학은 칸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처럼 18세기 철학의 주도자였다. 그는 기존의 형이상학을 비판하고,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며, 인식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철학 체계를 정립하려 했다.

그는 왜소한 체격(160cm 이하)에 기형적인 흉곽을 지닌 허약한 체질이었지만, 철저한 자기 규율로 삶을 유지했다. 매일 오전 5시에 기상해 오전엔 연구, 정오에는 사회인들과 점심을 함께하며 세상 이야기를 나눴다. 오후 3시 30분이면 산책을 나서며 ‘철학자의 길’을 걷고, 밤 10시 정각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의 정해진 산책 시간을 기준으로 이웃들이 시계를 맞췄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당시 독일 평균수명의 두 배 가까운 80세까지 살았다.

피히테

관념론의 실천철학자, 피히테

요한 고틀리프 피히테(Johann Gottlieb Fichte‧1762~1814)는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프리드리히 셸링과 함께 독일 관념론을 대표하는 철학자다. 그는 《지식학(Die Wissenschaftslehre)》을 중심으로 철학체계를 발전시켰으며, 칸트의 비판철학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사상을 세웠다. 철학사적으로 그는 칸트와 헤겔을 잇는 다리로 평가받는다.

1762년 독일 작센주의 라메나우에서 태어난 그는 예나대에 입학했다가 라이프치히대로 전학했으며, 졸업 후 가정교사로 일하던 중 1790년대 초 <종교와 이신론에 관한 아포리즘>을 집필했다. 이때는 스피노자의 결정론에 영향을 받았으나, 곧 칸트 철학과 마주하며 실천이성의 자율성과 자유 개념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칸트를 직접 만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를 찾아갔고, 칸트는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모든 계시에 대한 비판적 시론》의 출간을 주선했다. 익명으로 출판된 이 책은 칸트의 신작으로 오인되었고, 칸트는 곧 이를 바로잡으며 피히테를 공식적으로 소개해 일약 명성을 얻게 했다.

이 사건으로 피히테는 예나대 교수로 임명되었고, 1797년에는 《지식학》의 중요한 논고들을 발표했다. 하지만 1798년 포르베르크의 무신론적 글에 서문을 썼다는 이유로 무신론 논쟁에 휘말렸고, 결국 예나대 교수직에서 물러났다.

“독일 국민에게 고함”

피히테는 칸트의 도덕 철학을 계승했으며, 인간의 자율성과 도덕적 책임에 강한 확신을 가졌다. 그는 강직한 성품과 격정적인 언변으로도 유명했다. 비판자에게는 직설적인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고, 사유뿐 아니라 실천을 중시했다.

1806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패한 프로이센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적군 점령 하의 베를린 학술원에서 ‘우국 대강연’을 이어갔다. 1807년 말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매주 일요일 오후 진행된 이 강연은 《독일 국민에게 고함(Reden an die Deutsche Nation)》으로 묶였다. 그는 교육과 국민 정신의 진작이 독일 재건의 핵심임을 역설하며, 국민의 도덕적 자각을 촉구했다.

이후 베를린대 총장을 지낸 그는 1814년 부인으로부터 옮은 발진티푸스로 52세의 나이에 생을 마쳤다.

※ 참고문헌

강성률, 《2500년간의 고독과 자유 1》, 푸른솔
마르쿠스 가브리엘, 《나는 뇌가 아니다》, 전대호 옮김, 열린책들
프리드리히 카울바흐, 《임마누엘 칸트》, 백종현 옮김, 아카넷

윤재석

'조국 근대화의 주역들' 저자, 傳奇叟(이야기꾼), '국민일보' 논설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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