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룻기 4장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21-22)
룻기는 족보로 끝을 맺습니다. 성경의 족보는 종종 낯설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기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이 짧은 족보는, 단지 이름의 나열이 아니라 하나의 반전이며 룻기의 절정입니다.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남녀 간의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이 이야기가 구속사와 맞물린 중요한 서사라는 것을 알려주는 장치가 바로 이 족보입니다. 우리는 이 족보를 통해 인간사와 구속사가 얽혀 있는 모양을 그려 보게 됩니다.
구속 서사의 사이사이에는 수많은 인간사가 엮여 있습니다. 구속사가 씨실이라면 인간사는 날실입니다. 인간의 선택이라는 날실 사이를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씨실이 관통하고 있습니다. 룻이 들판에서 보리를 줍던 그 하루, 보아스가 성문 앞에서 기업 무를 책임의 순서를 기다리던 시간, 이 모든 자잘한 날실들 사이로 하나님은 다윗이라는 씨실을 꿰고 계셨던 것입니다. 이 씨실과 날실이 교차하여 만들어 내는 독특한 문양이 바로 역사인 것입니다.
나오미의 인생과 룻의 인생이 엮였습니다. 또한 룻의 인생과 보아스의 인생이 엮였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엮여 있습니다. 이 신비한 엮임과 얽힘이 룻기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룻기 4장에 나온 아무개, 그는 보아스보다 엘리멜렉 집안과 더 가까운 친족이었습니다. 기업 무를 책임이 그 아무개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엘리멜렉의 기업을 무르겠다고 말합니다. 이 부분은 룻기 전체에서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하는 지점입니다. 하마터면 룻이 전혀 엉뚱한 사람과 결혼할 뻔했습니다. 룻과 보아스가 결혼하지 못할 수도 있었던 그 아슬아슬한 순간, 하나님의 섭리는 촘촘한 날실의 틈조차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를 이야기로 초대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섭리를 논리적 체계나 교리로 가르치시기보다 이야기로 가르치십니다. 인문(人紋)과 천문(天紋)이라는 두 무늬가 어우러져 전혀 새로운 무늬를 만들어 내는 이야기입니다.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이지만, 그 속에는 하나님의 서사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엄격한 과학적 언어로는 측정할 수 없는 깊이입니다. 법률적 용어의 치밀함으로도 진술이 불가합니다. 오직 서사로만 표현될 수 있는 깊이와 넓이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역사의 씨실과 날실은 교직되고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내 오늘 하루의 서사도 구원의 서사와 함께 흐르고 있다는 것을 믿으며 이삭을 줍는 현장으로, 성문 앞으로 나아갑니다.
(잠깐묵상 오디오듣기)
https://youtu.be/2Sh8JQtzfAY?si=sCO-Pv-Jfnbxka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