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정일의 시선] 낙동강, 승부터널의 추억

승부역 표지판 <사진 신정일>

페북에서 만나는 ’과거의 오늘’은 낙동강의 승부터널이다. 텃밭이 세평 밖에 안 되고, 오지마을로 입소문이나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승부역을 처음 찾아갔던 때가 2001년 9월이었다. 9.11테러가 난 후 금강, 섬진강, 낙동강을 도보 답사로 마무리 한 뒤 네 번째 혼자서 떠난 여행길이었다.

길가의 집에 들어가 심규현(62세)씨를 만나 승부역을 지나서 강길을 따라가는 것이 가능하겠느냐고 묻자 가능하지 않을 것이란다. 돌아가는 것이 좋고 그렇쟎으면 산길 18km를 몇 시간이고 넘어가야 한다는데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며 또 하나 방법은 밤 8시 넘어 열차가 남아있으니 그 열차를 타고 가란다. 막막하다. 시간은 4시 50분이 넘었고 두 시간만 지나면 어두워질 것이다. 하여간 승부역에 들어가서 최종 결정을 내려 강길로 내려가자 출렁다리가 나타난다. 15명 이상 통과금지라고 쓰여진 출렁다리를 건너며 바라본 낙동강은 더없이 아름답다. “텃밭이 세 뼘 밖에 되지 않는다”는 한적하기 이를 데 없는 승부역에 들어가자 역무원 두 명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맞는다.

승부역사 <사진 신정일>


나는 내가 찾아간 이유를 얘기하고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방법은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저녁 8시20분에 떠나는 통일호를 타고 분천까지 가는 것과 하나는 터널 몇 개와 교량을 건너는 것이 있는데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것을 선택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철도법상 철로를 걷는다는 것 자체가 위법이고 또 그동안 5시45분, 6시30분 열차와 몇 개의 임시열차가 있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못 가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터널만 문제가 되지 철교는 괜찮습니다. 예전에는 철교만 있었는데 지금은 그 옆으로 사람이 다닐 수 있도록 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밤 중에 기적을 울리는 기차를 타고 싶은 환상을 품고 있다”고 말한 월리 넬슨의 말처럼 나 역시 열차를 타고 가고 싶은 마음이 없겠는가만, 낙동강을 따라서 걷는 내가 열차를 탄다거나 다시 되돌아간다는 것은 원칙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철길을 따라 갈 수밖에 없다고 얘기하자 터널 길이가 600m가 되는 승부터널(각금굴이라 부름)과 300m쯤 되는 터널 그리고 철교들이 많이 있는데 가능하겠느냐며 혹시 랜턴을 준비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강을 따라 걷다가 어두우면 아무 곳(여관, 민박=음식점)이나 자리잡고 잠을 청했던 내게 무슨 랜턴이 있겠느냐고 대답하자 시간이 없으니까 빨리 결정하란다. ‘그래 갈 수 있을 테지. 600m라면 보통의 내 걸음으로도 10분이면 통과할 테지’ 하며 시계를 보자 5시15분 승부터널 입구까지 10분, 나머지 15분에서 20분 안에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막차를 기다리며 곽재구 시인의 빼어난 시 ‘사평역에서’가 쓰여진 느낌을 공유하고 싶고 한겨울마다 눈꽃열차가 머무는 이곳 풍경 속에 나를 떼밀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떠나가야지 내가 떠나면 다시 두 사람의 역무원만이 남아 가고 오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나는 철로 길을 재촉한다. 강물은 속이 타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다는 듯이 유유히 흐르고 내 마음만 급하다. 천천히 걸어가리란 내 생각은 이렇듯 또 속절 없이 꺾이는구나.

승부역에서 출발한 철교, 곧 터널로 이어진다. <사진 신정일>


죽느냐 사느냐 그게 문제로다

드디어 터널 앞에 다다랐다. 한발 한발 천천히 걸어가자 그러나 웬 걸 50m쯤 들어갔을까. 코앞도 보이지 않는다. 땀이 비오 듯 흐르고 불현듯 무서움이 밀려온다. 갈 수 있을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캄캄한 어둠 오직 내가 앞으로 가고 있다는 막막한 확신 하나로 나는 한발 한발 내디딜 뿐이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걸음을 멈추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움직임의 세계에서 모든 것이 정지된 세계로 나는 들어온 것이다.

걸음을 옮긴다. 그런데 철커덕 소리 들리고 나는 화들짝 놀랜다. 알고 보니 자동카메라가 닫히는 소리다. 정신 바짝 차리자 한발 한발 떼어놓는데 그 넓은 좌우측의 철길이 왜 그렇듯 양쪽 발에 차이는지, 이러다가 넘어지거나 쓰러져 다치기라도 하면 나는 끝장이다. 문득 기차가 앞에서 오는듯한 착각이 들고 어떻게 할 것인가. 벽에 온 몸을 붙인 채 숨죽이고 있거나 철길 가장자리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을 것인가. 감이 서지 않는다. 다행히 그 소리는 착각이었고 온몸에 땀이 흥건하다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무사히 이 죽음의 터널을 빠져나가는 수밖에.

나는 너무 경솔하지 않았는가. 아무도 가지 않는 그 강 길을 따라 걸으며 그 순수하고 아름다운 강물을 보고 싶다는 그 열망 하나로 너무 무모한 선택을 하지 않았는가. 불현듯 그리운 얼굴들이 떠오르고 나 자신이 한없이 미워졌다.

어떻게 한다. 이러다 쓰러져 다치게 되면 죽을 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죽음이 그토록 두려운가, 아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거나 “가난에 찌들어도 천대를 받아도 이 세상에 사는 것이 좋다”는 말 또는 “저승 백년보다 이승 일년이 좋다”는 우리네 사생관을 나는 믿지 않는다. “죽음이란 저기 또는 여기에 있지 않고 그는 모든 길 위에 있다. 너의 그리고 나의 내면에 깃들어 있다”는 헤르만 헤세의 말처럼 삶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죽음 또한 아름다운 것이리라 생각해왔기 때문에 어느 때 죽음이 닥치더라도 나는 그 죽음을 겸허히 받아들이리라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한발 한발이 천근만근이 되는 듯 싶고 내 발자국 소리가 천둥처럼 크게 울려온다. 무섭고 외롭다. 나는 소리 내어 읊조린다. “신정일 너는 잘할 수 있어! 신정일 너는 잘해낼 거야.” 내 소리에 내가 놀라는 시간이 지나고 멀리서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희미한 빛 그 빛을 따라가는 그 순간이 얼마나 길었던가. 드디어 나는 승부터널 마지막 지점에 서있었고 그때까지 열차는 오지 않았다. 터널을 벗어나 맨 처음의 침목을 밟으며 나는 쟝그르니에의 산문 ‘지중해의 영감’ 중 한 부분을 떠올린다.

“삶이 때때로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지만 삶의 시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고 그 삶은 언제나 매일 매일 다시 시작 된다.”

나는 그 말처럼 다시 철길에서 발을 때고 다시 철길을 걸어갈 것이며 어느 날 또 다시 이런 순간에 직면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후엔 T․S 엘리어트의 시 한 구절을 꼭 기억할 것이다. “근심할 것과 근심하지 말 것을 분별케 하소서, 조용히 앉아 있기를 가르쳐 주소서.”

내가 지나온 승부터널을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기고 다시 철교를 지나자 눈빛처럼 희디흰 구절초꽃이 희망처럼 보였다. 그 강가에 늘어뜨린 채 피어있던 한 포기의 구절초는 가슴 조렸던 내 마음의 상처를 씻어 내주는 듯 싶었다.

칠레의 국민 시인 파블로 네루다는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한 편의 절망의 노래> 중 ‘한 여자의 육체’에서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고 썼는데, 나는 15분 동안 그 터널을 지나면서 10년 동안의 생각을 했을 것이다.

온갖 떠올랐던 상념들이며 온 몸을 흘렀던 땀들은 내 생이 다하는 날까지 내 마음 속에 남아있을 것이라 믿지만 그 역시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느 날 잊혀지고 말 것이다. 아무도 가지 않는 길 가서는 안 된다고 말리던 길 그 길에서 나는 무엇을 잃었고 무엇을 얻었는가.

그때로부터 25년의 세월이 흘렀구나. 그때 내가 발을 담궜던 강물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형태로 존재하고 있을 것이며, 그 때 강 길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세월이 속절없이 흐르고 흘렀구나.

신정일

문화사학자, '신택리지' 저자, (사)우리땅걷기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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