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심양을 떠나며
심양 호텔에서도 새벽 일찍 눈이 떴다. 예의 아침 식사 전에 집사람과 함께 주변 산책을 나갔다. 호텔 뒤에는 작은 운하를 끼고 있는 수변공원이 있었다. ‘황고(皇姑)는 이야기가 시작되는 곳이다’라는 공원 간판이 눈에 띄었다. 황고라는 이름은 황고둔이라는 옛 마을 이름에서 왔다는데, 누르하치와 관련된 여인의 무덤에서 유래했다는 전승이 있지만 정확한 어원은 분명하지 않았다.

호텔 뒤에는 신개하(新開河)라는 작은 운하가 흐르고 있었고, 강 건너에는 요대의 사리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탑과 물굽이가 만나 탑만(塔灣)이라는 이름이 생긴 곳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이 일대가 청대 성경(盛京)에서 북경으로 향하던 대어로(大御路)의 길목이었다는 사실이다. 소서문을 나온 길은 화산로와 탑만을 지나 영안교로 이어졌다.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연암이 심양을 떠나던 옛길 가까이에서 하룻밤을 묵었던 셈이다.
오늘은 영안교에 들렀다가 요하를 건너 북진으로 간다. 북진에는 숭흥사 쌍탑과 북진묘, 그리고 의무려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요동을 넘어 요서로 건너가는 역사적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 영안교에서
영안교(永安橋)는 심양 황고구 숙소에서 25㎞ 정도 떨어져 있었다. 1641년 홍타이지가 조성한 영안교는 길이 37미터, 폭 6미터 남짓 되는 세 개의 아치를 가진 석교였다. 외형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고 다리 밑으로 큰 물결이 넘실거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만주어·몽골어·한문 세 언어로 적힌 고풍스러운 건립비의 모습 하나만으로도 이 다리의 역사적 가치는 충분히 입증되고 있었다.
영안교는 그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1641년 조성한 이 다리는 당초 군사 목적으로 건설된 도로시설이다. 그것도 조선을 신하의 나라로 굴복시킨 4년 뒤, 명과의 요서 전선을 앞두고 건설한 다리다. 영안(永安)은 승리한 청나라에는 영원한 안녕을 의미하지만 패배한 상대에게는 영원한 굴종을 의미할 수도 있는 작명이다.
건륭제도 청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 홍타이지의 능묘를 참배하러 동순할 때마다 이 다리를 건너면서 영안교에 대한 감회를 여러 차례 밝혔다. 1754년에는 영안교를 지나며 먼저 이렇게 적었다. “성경 서쪽에서 광녕에 이르는 길은 원래 저습지가 많아 여행이 매우 어려웠다. 우리 태조가 심양을 평정한 뒤 곧 첩도 120리를 닦도록 명했고, 태종은 숭덕 6년에 다시 영안교를 세웠다. 그 뒤로 군대의 행군에 막힘이 없어 큰 공업을 이룰 수 있었다.”
그리고 이어 시를 남겼다.
“길을 닦고 다리를 놓는 일은 선조의 지휘를 거친 것이니
군대가 오가기를 나는 듯 빠르게 하였다.
어찌 정관 연간 당 태종의 요동 정벌을 대단하다 하겠는가.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으나 헛수고였고 이룬 공도 보잘것없었다.”
除道修橋經指揮,
師行來往迅如飛。
奚稱貞觀征遼日,
布土徒勞奏績稀。
건륭제는 영안교 조성의 군사적 목적을 명확히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당 태종의 요동 원정과 대비하여 청 태조와 태종의 도로·교량 건설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다리를 건넜을 많은 조선 관리들은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한양의 삼전도비 치욕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한 영원한 안녕이란 말인가.’ 속으로 되물었을 성싶다.
실제로 숭명배청 의식이 강했던 17세기 조선 사신들은 ‘영안(永安)’을 청이 중국을 영원히 지배하겠다는 선언으로 읽었고, 오랑캐의 운세가 백 년을 넘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황하지청(黃河之淸)을 그리워했다. 그러나 18세기 중기 이후 영안교를 바라보는 조선 사신들의 시선은 조금 달라졌다. 황하지청이 말 그대로 백년하청(百年河淸)이 되면서, 영안교에 대한 삼전도비식 독해를 내려놓고 다리와 도로의 실용적 모습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연암 역시 영안교에 대한 감상보다는 그 실용성에 먼저 눈을 돌렸다. 그는 영안교에서 요하 강변까지 120여 리에 이르는 요택에 아름드리나무를 연결하고 묶어 습지를 통과하는 목도를 만든 것에 감탄했고, 주변의 드넓은 습지를 농지로 개간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서 어떤 사람의 말을 인용하여, 이 드넓은 습지를 방치하는 것은 천 리나 되는 기름진 땅을 포기할지언정 척박한 땅에서나마 나라에 충의를 다하는 백성을 만들려는 위정자들의 심모원려가 아닌가 하는 반론도 남겼다.

영안교, 이제 다시 언제 오나 싶다. 영안, 이제 영원히 안녕!
- 요하를 건너며
요하에 당도했다. 연암이 배와 목교로 건넜던 바로 그 강이다. 서요하와 동요하가 합류하여 흐르는 본류 위에 거류하교가 길게 놓여 있었다. 다리의 길이는 1.12㎞ 남짓이었다. 다리 아래에는 젖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는 넓은 초지가 펼쳐져 있었지만, 그 너머로 흐르는 강물의 폭은 결코 좁아 보이지 않았다.

다리 위로는 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렸다. 바람 한 점 없었다. 물론 그늘도 없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줄줄 흐를 판이었다. 그런데도 모두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이제 요동을 넘어 요서로 간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요하 한가운데에 서자 이상하게도 시간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 강 건너 어딘가에서 고구려 사람들이 말을 달려올 것만 같았다. 어느새 우리는 타임머신을 타고 천오백여 년 전의 역사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436년이었다.

장수왕이 보낸 고구려 장수 갈로와 맹광이 갑자기 요하를 건넌다. 그들은 말을 달려 요서의 용성까지 진출하여 북위 태무제에게 쫓기고 있던 북연왕 풍홍과 그 일행 수천 명을 구출해 고구려로 데려왔다.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지 9년이 지난 때였다. 상상해 본다. 갈로와 맹광이 이끄는 고구려 군사들이 요하를 건너 서쪽으로 내달리고, 그 뒤로 북연의 왕족과 백성들이 끝없이 따라붙는다. 피란 행렬은 수십 리에 걸쳐 이어졌을 것이다.
문득 <발해고>를 쓴 유득공이 떠올랐다. 우리 역사의 시선을 압록강 안쪽에만 가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요하 너머를 우리 땅이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일이다. 고대 국가의 경계를 오늘날 지도 위의 선처럼 생각하는 것부터 무리가 있을 것이다.
성읍과 군사적 거점을 중심으로 지배력이 미쳤고, 그 사이의 경계는 힘의 크기에 따라 끊임없이 흔들렸다.
그렇게 생각하니 풍홍 구출 사건도 달리 보였다. 그 사건 자체가 고구려의 영토가 곧 요서 전역이었다는 증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5세기 고구려의 군사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필요할 때 어느 순간 요하를 훌쩍 넘어 요서 깊숙한 곳까지 뻗어갈 수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영토와 세력은 같은 말이 아니었다. 요하 동쪽에 나라를 두고도 필요하면 요하를 건너 수백 리 밖까지 말을 달릴 수 있었던 나라. 그것이 5세기 고구려였다. 그제야 현지 가이드가 왜 그토록 고구려를 이야기할 때마다 목소리를 높였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한낮의 찌는 더위를 아랑곳하지 않고 씩씩하게 걸었다. 뜨거운 햇살 아래 얼굴은 점점 검게 타들어 갔지만,
천오백 년 전 요하를 건너던 고구려 기병을 떠올리는 동안 마음 한구석은 그보다 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요하를 건너는 것은 강 하나를 건너는 일이 아니었다. 요동에서 요서로, 현재에서 과거로 건너가는 일이었다.
- 광녕으로 가는 길
요하를 건너자마자 드넓은 요서 벌판이 펼쳐졌다. 지금은 옥수수 평원이지만 한때는 영안교에서부터 시작된 요택(遼澤)이 끝없이 이어졌을 형세다. 연암의 사행 때에는 광녕(廣寧)으로 불렸던 북진(北鎭)을 향해 한참을 달렸다. 끝없을 것만 같은 지평선 끝에 커다란 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이라 했다.
연암은 요하를 건넌 뒤 백삼십여 리를 달려 이도정을 지나 은적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서북쪽 하늘 끝을 가로막은 푸른 장막 같은 의무려산’을 보았다고 했다. 어느새 우리도 거류하교에서 60㎞ 이상을 달려온 셈이었다. 차창 밖으로 드러나는 의무려산은 평원에 우뚝 선 산벽처럼 다가왔다.
차창 밖 들판 한가운데에는 ‘주먹 크기’로 솟아 있는 작은 산 소흑산도 보였다. 소흑산 마을은 연암이 기상새설(欺霜賽雪)의 진리를 깨달은 득도처였다. 은적사에서 의무려산을 처음 본 연암은 그날 밤 소흑산 마을에서 묵었다. 전날 신민둔에서 있었던 것처럼 이곳에서도 연암의 서예 솜씨 뽐내기 마당이 펼쳐졌다. ‘新秋慶賞’ 네 글자를 필두로 구양수의 「취옹정기」와 소동파의 「적벽부」에서 구절을 따온 ‘翁之樂者山林也 客亦知夫水月乎’를 써주자 마을 사람들이 환호했다.
기세가 오른 연암은 여자들의 머리 장식품을 취급하는 점포 주인에게 가게 현판 글씨까지 써주겠다고 자청했다. 사실 속셈이 따로 있었다. 전날 신민둔 전당포 주인이 심드렁하게 반응했던 ‘欺霜賽雪’ 네 글자를 다시 써서 어제의 수치를 설욕해보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제 전당포 주인과 마찬가지로 ‘欺霜賽雪’ 네 글자를 받아 든 장식품 가게 주인의 표정이 수상쩍었다. 게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저희 점포는 오로지 부인네들의 머리 장식품을 취급하는 곳이지, 밀가루를 취급하는 가게는 아닙니다.” 연암은 그제야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전날의 일을 몹시 부끄러워했다.
사실 연암은 길을 오면서 여러 점포의 문미에 걸린 ‘欺霜賽雪’을 보아왔다. 며칠 전 난니보의 한 점포에서는 그 글씨가 하도 좋아 말 위에 앉은 채 한참 들여다보기까지 했다. 그는 그 말을 장사하는 사람이 자기 마음씨가 ‘서리처럼 깨끗하고 눈보다 희다’고 자랑하는 고상한 문구쯤으로 생각했다. 그것이 밀가루가 서리와 희기를 다투고 눈보다 더 희다는 광고 문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연암이 누구인가. 점포 주인의 말을 듣자 태연하게 대꾸했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소. 그저 시험 삼아 한번 써 보았을 뿐이오.” 광녕으로 가는 길은 해학의 길이었다.

- 쌍탑에서
마침내 의무려산의 장관이 펼쳐지고, 그 아래로 숭흥사의 쌍탑이 보인다. 차창 밖으로 이따금 무너진 성벽도 보였다. 천하의 대세가 흔들린 광녕성의 흔적이다.
이 일대에는 거대한 이성량 석패루가 보여주듯 요동총병 이성량의 위세가 드높았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명군 제독으로 조선에 온 이여송의 아버지이자, 요동을 30년 이상 장악한 명의 실력자였다. 그러나 한때 그의 영향권 아래 있던 누르하치가 1622년 광녕성을 함락하면서 명의 요동 지배는 결정적으로 흔들렸다. 연암의 말대로 천하의 대세가 청으로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숭흥사의 쌍탑은 옛 광녕성의 동북쪽 모퉁이에 서 있었다. 두 탑은 동서로 43미터 떨어져 나란히 서 있으며 모두 팔각 13층 실심(實心) 밀첨식(密檐式) 벽돌탑이다. 높이도 둘 다 43미터 남짓 된다고 한다. 탑신 각 면에는 불감과 좌불, 협시상, 비천상 등이 조각되어 있고 기단에는 역사상과 연꽃무늬 두공 장식이 있었다. 탑의 형식은 요양 백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나라는 절보다 탑을 중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쌍탑이 세워질 당시 절간 건물은 없었다고 한다. 쌍탑은 의무려산을 바라보며 광녕의 들판에 우뚝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천 년 전 거란 제국의 위용을 그대로 보여주었을 터이다.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덕분일까. 아니면 천조제가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 덕분일까. 용케도 쌍탑은 명청교체기의 전화(戰禍)를 이겨냈다.

일행 가운데 불교 전문가 한 분이 계셨다. 쌍탑을 보자 질문이 쏟아졌다. 서탑 불감 안에 모셔진 불상은 석가모니불인가요? 협시보살은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고요? 동탑 본존은 아미타불이고 협시보살은 관세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인가요? 팔각은 팔정도(八正道)를 의미하고 13층은 십삼천(十三天)을 상징하나요? 밀첨식은 누각식과 어떻게 다른가요? 탑돌이는 인도에서 유래한 우존좌비(右尊左卑) 원칙에 입각해 오른손이 탑을 향하도록 돌아야 하나요?
다양한 질문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불교 전문가도 이곳을 처음 방문한 여행객이기에 정확한 답변을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우리 일행은 숨은 고수 덕분에 탑에 대한 이해도가 대번에 탑 수준으로 올랐다.

- 북진묘에서
숭흥사 쌍탑을 지나 다음으로 찾은 곳은 북진묘(北鎭廟)였다. 이름에 묘자가 붙었지만 절도 무덤도 아니다. 의무려산을 진산(鎭山)으로 삼아 역대 왕조가 국가의 이름으로 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우리도 의무려산을 오르기 전에 산에 대한 예의를 갖출 요량으로 북진묘를 찾았다.
북진묘는 의무려산을 향해 남북으로 길게 뻗은 축선형 제향 건축물이었다. 묘 앞에는 다섯 개 문을 가진 패루가 북진묘의 위세를 드러냈다. 산문과 신마전을 지나 대전 앞에는 비림(碑林)이 펼쳐져 있었다. 산신 앞에 도열한 황제와 권신들의 미라처럼 느껴졌다. 숙연한 공간임에는 틀림없었다.
연암이 기록한 절이나 도교 사원들은 보이지 않았다. 청심환을 건네주고 복숭아를 받아낼 도사도 찾을 길이 없었다. 반쯤 죽은 노송의 흔적조차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연암은 「북진묘기」에서 그 노송을 이렇게 기록했다. ‘북진묘 마당에 반쯤 말라 죽은 오래된 소나무가 있고, 건륭제가 갑술년(1754년) 동순할 때 직접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지어 검은 돌에 새기고 바위 속에 두었다.’
「피서록」에서는 건륭제의 북진묘 노송 시까지 소개했다. ‘북진묘 문 서쪽에 우산 같은 소나무가 있었는데
절반은 마른 줄기가 남아 있었고 절반은 푸르게 우거졌다. 정신을 모아 바라보니 포박자를 보는 듯하고
그 모습을 그리자니 진소옹만 못한 것이 부끄럽다. 그 아래 서 있으니 맑은 날인지 비 오는 날인지 문득 의심스럽고 눈앞의 모습을 보며 색즉시공의 이치를 깨달을 만하다. 언제 유월에 그 뿌리 곁에 앉아 소나무 사이로 이는 쏴쏴 바람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산천은 의구하되 노송은 어디로 갔을까. 연암이 보고 건륭제가 노래한 반쯤 죽은 노송은 북진묘 마당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건륭제가 노송 시화를 오석에 새겨 바위에 끼워놓았다는 자취도 우리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에게 큰 위안거리 하나가 북진묘 비림 속에 숨어 있었다.
여러 사람이 나서서 마침내 찾아낸 건륭제의 「醫巫閭山四景」 시비다. 건륭제가 의무려산 성수분(聖水盆)을 노래하면서 조선인을 언급했다기에 궁금했던 것이다.
‘늘어선 절벽에서 물이 발처럼 드리워 떨어지고
속세의 티끌을 끊어 고요하고 편안하다.
조선 사람들이 새긴 시구가 많이 있으니
기자의 홍범 문화가 지금까지 이어져 왔구나.’
列崖垂落水如簾
隔斷塵氛靜且恬
多有朝鮮人泐句
箕疇文化至今漸
건륭제의 북진묘 노송 시화에 대해서는 전문까지 옮겨 적었던 연암이지만 건륭제의 성수분에 대해서는 열하일기」 어디에도 언급하지 않았다. 시는 연암이 이곳을 찾기 불과 2년 전인 1778년에 지어졌다. 그때 이미 이 시가 돌에 새겨져 있었는지, 있었다면 연암이 왜 지나쳤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1778년 건륭제의 「의무려산사경」에는 조선인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었다. 네 편 가운데 두 편에는 나라의 동단왕 야율배가 등장한다. 의무려산은 경관뿐만 아니라 천 년의 역사까지 간직한 산이었다. 어쩌면 천 년 전 봉인된 거란 제국이 이제 의무려산에서 하나씩 풀려나올지도 모르겠다.

- 의무려산에서
의무려산의 최고봉 망해봉은 866미터이고 북한산 백운대는 836미터다. 최고봉 높이로만 보면 두 산의 차이는 30미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동북에서 서남으로 약 45㎞나 이어지는 의무려산의 전체 면적은 630㎢에 이른다. 북한산국립공원의 여덟 배가 넘는다. 의무려산은 이름 그대로 커다란 산괴(山塊)였다.
그 거대한 산덩어리 안에는 자연의 식생만이 아니라 인간의 역사도 켜켜이 쌓여 있었다. 요나라 황실의 사냥터와 독서처가 있었고, 황실 귀족들이 영면할 왕릉도 가슴에 품었다. 조선 선비들의 인정 욕구를 채워줄 기암괴석도 곳곳에 뿌려 두었다. 담헌의 『의산문답』에 등장하는 실옹이 우주의 도를 논할 도량까지 어딘가 은밀한 곳에 마련해 두었을 것만 같았다.
어찌 한걸음에 달려가지 않겠는가. 산을 오르는 데 건륭제의 「의무려산사경」은 친절한 등산 안내서였다. 우선 성수분에서 건륭제가 보았다는 조선 선비들의 각자(刻字)를 찾아 나섰다. 풍경구 입구에서 관음봉을 거쳐 망해사까지 올랐지만 조선 선비들의 각자는커녕 성수분조차 찾지 못했다.
뜻밖에도 건륭제가 사경(四景)에서 읊은 광관정(曠觀亭)은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광관정은 요나라 동단왕 야율배가 책을 읽고 경치를 바라보던 곳으로 전해지는 자리였다. 우리 일행이 한걸음에 오른 망해사가 그곳이 아닌가 싶었다.
건륭제는 이렇게 노래했다.
‘옛 산당은 오늘날 정자가 되었고
눈앞에 평원과 푸른 바다가 고요히 펼쳐진다.
아마도 요왕이 책을 보관하던 곳이었으리니
지금도 그 빼어난 푸른빛이 눈에 가득하다.’
山堂此日已為亭
眼底平陵碧海渟
應是遼王貯書處
至今秀色蓄眸青
건륭제가 말한 요왕은 요나라를 세운 야율아보기의 장남 야율배였다. 아버지의 뒤를 이을 황태자였지만 어머니 술률태후의 뜻에 따라 동생 야율덕광에게 왕위를 내주어야 했던 인물이다. 야율배는 의무려산 정상에 망해당을 짓고 수만 권의 책을 모아두었다고 한다. 왕위를 내주고 산과 책을 가까이했던 야율배에게 천하에 대한 미련은 정말 없었던 것일까.
그 마음을 600여 년 뒤 건륭제가 들여다본다. 건륭제는 야율배가 은거했다고 전해지는 도은곡(道隱谷)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깊은 산은 은거하기에 족하다고 들었으니
나무와 돌, 계수나무와 소나무를 이웃하여 사는구나.
누가 알았으랴, 뜻을 감추고 궁핍을 즐기던 사람이
본래는 몸을 떨쳐 천하의 사슴을 좇던 사람이었음을.’
聞道深山足隱淪
與居木石桂松隣
誰知潛志樂飢者
原是㩳身逐鹿人
‘천하의 사슴을 좇는다(逐鹿)’는 말은 천하를 다툰다는 뜻이다. 1778년 도은곡을 찾은 건륭제는 산속의 은자 야율배가 실은 한때 천하를 다투던 황자였음을 노골적으로 들춰낸 것이다.
사실 우리는 도은곡을 찾지 못했다. 대신 망해사 인근의 천년송 아래에 서자 문득 담헌의 실옹(實翁)이 떠올랐다. 그리고 ‘젊은’ 담헌 허자(虛子)가 의무려산을 오르는 모습도 보이는 듯했다. 두 사람은 밤하늘의 무수한 별들을 바라보며 끝없는 문답을 나누었다.
인간의 눈이 아니라 무한한 우주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시작하였다. 우주의 눈으로 바라본 지구는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에 불과했다. 지구는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다. 우주는 끝이 없었다. 인간은 만물의 중심이 아니었다. 인간과 만물은 평등했다. 중국은 천하의 중심이 아니었다. 중화와 오랑캐가 따로 없었다.
마침내 인간 중심주의도 사라지고 중화주의도 자취를 감추는 기적이 일어났다. 실옹과 허자의 오랜 문답 끝에 의산의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발해만이 내려다보이는 망해사에서 우리는 의무려산의 장관을 보았다.
와분(瓦糞) 장관론을 펼친 연암도 우리를 나무라지는 않았으리라. 끝내 들쭉술 잔이 공중에 난무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