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세상 살아가는 사람을 비롯해 모든 생명은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저세상으로 간다. 저세상이 어디인지는 나도 모른다. 피하고 숨고 도망친다고 안 갈 수도 없다. 때가 되면 누구든 간다. 흔히 사람이 죽으면 ‘북망산으로 간다’고 한다. 중국 북망산에 무덤이 많았던 데서 나온 말이라 한다. 우리 옛 서울에는 또 ‘시구문’이 있었다. 성안에서 죽은 이들의 시신이 성 밖으로 나갈 때 지나던 광희문을 그렇게 불렀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이 갈리는 문이었다. 그 문을 드나드는 과정에서도 별별 일이 있었다고 한다. 현상금이 걸린 수배자가 시신인 척 위장해 빠져나가려 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몸부림으로 어수선하다.
나는 서울역 앞과 공원 등에서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침을 튀기던 노숙인들과 일주일가량 어울린 적이 있다. 왜 거리로 나오게 됐는지, 어떻게 살다가 여기까지 왔는지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꽃동네 오웅진 신부님을 따라 서울역 앞에서 빵과 우유를 나눠드리기도 했고, 그 뒤에는 <주간동아> 기자와 함께 그분들의 삶을 취재하기도 했다. 그분들을 만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너나 나나 마지막에는 시구문을 지나 북망산천으로 갈 사람들인데, 누구는 거리에서 잠을 자고 누구는 백만장자, 억만장자가 되어 떵떵거리며 산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 자리를 떠날 때마다 내 마음을 태산처럼 짓누르는 질문이 하나 있었다. 만약 내 자손이 노숙자가 되어 거리를 떠돈다면 어떨까. 먼저 저세상으로 간 내가, 내가 살았던 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 내 핏줄이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겨울밤 길바닥에 누워 있는 모습을 바라본다면 그 마음이 어떻겠는가. 가슴이 터질 것이다. 살아 있을 때 금덩어리며 현찰이며 주식이며 호화주택이며 온갖 재산을 모았다. 세금 한 푼이라도 덜 내려고 이리저리 궁리하고, 자식에게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겠다며 악착같이 쌓아놓고 떠났다. 그런데 그렇게 물려준 재산을 자손이 한순간에 날리고 거리로 나앉는다면? 엄동설한 서울역 앞에서 잠을 자고, 얻어먹은 빵 한 조각을 씹으며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는 내 핏줄을 바라보게 된다면, 저세상의 조상은 제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후회하지 않겠는가. “내가 살아 있을 때 왜 저렇게 돈만 모았을까. 왜 내 자식과 손주가 살아갈 세상을 좀 더 사람답게 만드는 데 쓰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세상을 살면서 돈 많던 집안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사람들은 나만 잘살면 된다고 생각한다. 돈, 귀금속, 땅, 강남 아파트, 달러, 채권, 금은보화, 현금을 자식에게 잔뜩 남겨주면 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니다. 수십 년 모은 재산도 자손의 잘못된 선택 하나면 날아간다. 반대로 개인 재산은 없어져도 사회안전망이 튼튼하고, 이웃이 서로 붙잡아주고, 나라가 사람을 거리로 내몰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설 기회가 생긴다.
안전한 국가, 평화로운 마을,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는 경찰과 단속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산과 보험만으로도 부족하다. 법만 잔뜩 만들어놓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결국 내가 잘살기 위해서도 남이 함께 살아야 한다. 이웃이 무너지면 내 안전도 오래가지 못한다. 누군가가 굶주리고 절망하고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밀려났을 때 그 절망은 어느 순간 사회 전체를 향한다. 우리는 이미 ‘묻지마 범죄’라는 이름으로 그 장면을 보고 있다. 혼자 잘사는 세상은 오래가면 결국 무법천지가 된다.
그래서 나는 서울역 앞 거리의 천사들을 보고 돌아설 때마다 이 말을 떠올린다. “혼자 잘살면 뭐 하능교?” 내 자식에게 아파트 한 채 더 남겨주는 것보다, 내 자식이 길거리에 나앉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세상을 남겨주는 것이 더 큰 유산인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언젠가는 시구문을 지나간다. 그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금덩어리는 하나도 없다. 남는 것은 내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내가 살다 간 세상이 전보다 조금이라도 따뜻해졌느냐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