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마(붉은 말)의 새해 병오년을 맞는 해는 빛을 잃었다. 저 달은 그칠 줄 모르고 밤새 울었다. 을사년을 보내고 경오년을 맞으며 우주 변화의 원리에 따라 새해 소망을 다시 세웠다. 지난해 계획을 무산시킨 실수와 잦은 오류, 달성하지 못한 목표들을 돌아보며 깊이 반성했다. 모난 부분은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 원인을 가다듬고, 새해를 맞는 다짐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때 아는 지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사를 나누기가 바쁘게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안성기 씨가 음식을 드시다가 기도가 막혀 응급실로 가셨다고 합니다.” “어느 병원입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자마자 관록과 탄탄한 실력의 배창호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필자의 두 번째 작품 ‘꼬방동네 사람들’을 멋진 영화로 되살려준 감독이다. 영광스럽게도 배창호 감독이 연출자로 데뷔한 작품이기도 하다. 덕분에 필자는 값없이 이름값만 올린 셈이 됐다.
필자는 1948년생이고 안성기 님은 1952년생이니 내가 네 살 먼저 태어났다. 나이 이야기를 하자는 건 아니다. 내공이 탄탄하고 끝내 성공하는 사람들을 보면 나이와 상관없이 한눈팔지 않는다. 어느 분야든 오직 한 길, 자신이 가야 할 길만을 향해 간다. 안성기 님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안성기 님은 다섯 살이던 1957년, 김기영 감독의 영화 ‘황혼열차’에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이후 거의 70년에 가까운 시간을 영화에 바쳐 살았다. 20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으니, 그는 영화에 살고 영화에 죽는 인생이었다. 배창호 감독 또한 만만치 않은 뚝심과 저력, 그리고 무궁무진한 지혜를 지닌 인물이다.
안성기 님이 태어난 임진년 바로 다음 해 계사년에 태어났으니, 기독교식으로 말하자면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처럼 한 시대를 앞뒤로 잇는 군번이다. 배창호 감독은 영화의 꿈을 품었으나 곧장 영화계로 가지 않고 현대건설에 입사해 남아공 등 해외 현장에서 근무했다. 가야 할 길이 달라 보였을지 모르나 그의 목표와 고집은 결국 막을 수 없었다. 가슴속 영화 사랑은 오히려 더 맹렬해졌다. 마침내 그는 영화의 귀재 이장호 감독의 조감독으로 들어가 헌신과 성실로 자신의 자리를 차근차근 다져 나갔다.

‘바람 불어 좋은 날’, ‘어둠의 자식들’(필자의 첫 작품), ‘카수영애’. 이 세 작품을 마친 뒤 곧바로 다음 영화 준비에 들어갔고, 필자의 두 번째 작품 ‘꼬방동네 사람들’로 감독 데뷔 테이프를 끊었다.
1980년대는 정치적으로 암울한 시절이었다. 유신의 늑대를 피하니 전두환이라는 범을 만난 형국이었다. 그러나 배 감독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천만에 만만의 콩떡이었다.
영화 예술과 흥행, 작품성과 상업성, 예술성과 대중성. 배창호 감독은 이 모든 경계를 읽어낼 줄 아는 선견지명의 소유자였다. ‘고래사냥’, ‘깊고 푸른 밤’, ‘러브 스토리’, ‘정’, ‘흑수선’….보배 같은 작품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영상미학과 상업성을 충돌시키되, 애무하듯 조율하며 이질감 없이 풀어냈다.
필자가 지나가는 말처럼 “안성기 님은 반드시 큰 대배우가 될 테니 함께 뛰라”고 말했더니, 그 말 그대로 지금까지 두 사람은 우정을 지키며 영화 예술의 진짜 가치를 사수해왔다.
잘 가라 을사년. 어서 오라 병오년. 내일이면 오고 가고, 가고 오고, 돌고 도는 인생길이다. 단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고 음식을 먹다 기도로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심정지는 심폐소생술로 다시 돌아왔다고 했기에 희망을 놓지 않으려 했다. 응급중환자실에서 산소마스크 등 연명 치료를 받고 있다는 말까지는 들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벼락 같은 비보가 들려왔다.
2026년 1월 5일 오전 9시 전후, 눈을 감으셨다는 소식이었다. 하늘도 울고 땅도 울었다. 영화 70년 인생에 마침표가 찍혔다. 입에서 터져 나온 말은 이것이었다. “아이고 주님, 살려주시지요.” 한 가닥 희망의 끈을 붙잡고 기도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비보 앞에서 망연자실했다. 입술은 떨리고 혀는 굳어 말을 잃었다. 가슴 위에는 태산이 얹힌 듯 숨이 막혔다. 큰 바위덩이에 깔린 것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칼춤을 앞세워 날아든 비보는 칼추위보다 더 냉랭했고 칼끝처럼 날카로웠다.
선한 배우 안성기. 국민 배우 안성기. 착한 연기자 안성기. 명연기의 명품 배우 안성기. 영화 예술인 안성기.
언론인 후배가 전해준 긴급 뉴스에 귀를 기울였다. 전후 사정을 듣고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서로 얼굴만 바라보다가 한 사람씩 자리를 떴다. 슬픔보다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하나님도 무심하시지. 하필이면 왜, 왜, 왜 안성기입니까.”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하는 심정이었다.
그러나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마디는 해야겠다. 국민 배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어느 분야든 공짜는 없다. 안성기라는 배우를 보며 그 사실을 배웠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거울 앞에 섰다. 표정을 만들고, 지우고, 다시 만들었다.
피식피식, 실룩실룩, 삐쭉빼쭉. 눈 따로, 눈썹 따로, 입술 따로.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는 연습을 평생처럼 반복했다. 노력에 노력을 더해 국민 배우가 됐다. 내가 본 노력의 아이콘, 그가 바로 안성기였다. “저 친구는 연기하다가 죽기 직전에도 웃으며 손 흔들다 하늘로 갈 사람이다.” 그를 지켜본 이들이라면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나는 삼양동에 살았고 안성기는 수유동에 살았다. 한동안 거의 매일 만났다. 그래서 국민 배우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눈앞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조용한 남자. 잘 웃는 배우. 우정 깊은 친구. 영화 말고는 몸 관리가 전부일 정도로 자기 자신을 가꾸는 데 충실했다.
안성기는 결코 남의 흉을 말하지 않았다. 듣지도 않았고, 전하지도 않았다.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인격자였다. 그러면서도 사회적 약자를 외면한 적은 없었다. 잘 알다시피 그는 유니세프 활동에 헌신했다. 그러나 한 번도 그것을 자랑하거나 생색낸 적이 없었다.
그의 과묵함 속에는 실천하는 사랑, 조용한 믿음, 소리 없는 기부가 있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그대로 살다 간 사람이었다. 끼어들지 않아도 천국은 무사 통과일 것이다.
국민 배우 안성기. 명품 연기자 안성기. 찬란한 배우 안성기 님.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 모든 갈등과 증오, 모든 분열과 상처를 내려놓고 사랑만이 넘치는 귀한 하늘로, 복된 땅으로 편히 가시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