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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기행③】 요동에서 심양으로

태자하는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를 통한 진시황 암살에 실패한 뒤 이곳까지 숨어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흐르는 강이다.

1. 태자하에서

요양의 아침이 밝았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운동복 차림으로 숙소 가까이에 있는 태자하(太子河)로 달려갔다. 요양시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태자하는 연나라 태자 단이 형가를 통한 진시황 암살에 실패한 뒤 이곳까지 숨어왔다가 죽었다는 전설이 흐르는 강이다.

새벽 5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지만 강변에는 이미 조깅을 하거나 광장무(廣場舞)를 즐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우리 부부도 그들 틈에 섞여 태자하 강변을 걸었다.

문득 연암의 태자하 도하(渡河) 이야기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날은 바로 연암이 호곡장론을 펼친 날이었다. 아침 냉정(冷井)에서 밥을 먹고 십여 리를 더 간 뒤, 산악지대의 마지막 산자락을 막 돌아나온 순간 광활한 요동벌판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암은 말을 세우고 사방을 바라보다가 “참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 만하구나(好哭場 可以哭矣)”라고 탄성을 질렀다.

그러나 그날 저녁의 연암은 아침의 연암과 영 딴판이었다.

요양 구경을 마치고 일행이 묵을 숙소로 돌아가려면 태자하를 건너야 했다. 마침 강물이 크게 불어 배 없이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처지였다. 말복이 가까운 늦더위에 온몸은 땀으로 젖고 목은 타들어 갔다. 배까지 고팠다.

강 위에는 고깃배들이 떠 있었지만 아무리 불러도 들은 척하지 않았다. 연암의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때 동행 하나가 아침의 호곡장론을 들먹이며 그를 놀렸다.

“이런 때야말로 울어야 할 판인데, 왜 울지는 않고 화만 내십니까?”

한참 뒤에야 고깃배들이 약속이나 한 듯 앞다투어 다가왔다. 연암은 그제야 사공들이 배삯을 올리려고 일부러 뜸을 들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더욱 화가 났다. 하지만 강을 건너려면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결국 비싼 삯을 치르고 작은 배에 몸을 실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불어난 강물은 거칠었고 작은 배에는 여러 사람이 올라탔다. 강을 건너는 동안 연암은 통원보에서 연산관으로 가다가 물에 빠질 뻔했던 때보다도 더 큰 위험을 겪었다.

누군가 아침에 도를 깨달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고 했던가.

연암은 그날 아침 요동벌판을 바라보며 호곡장의 도를 깨달아 호연지기를 펼쳤다. 그런데 저녁에는 목이 타서, 땀이 나서, 배가 고파서, 급기야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이 또한 ‘조문도 석사가의’가 아니겠는가.

이른 아침 태자하 강변을 걸으면서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혼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동경성(東京城) 남문. 오래전에 무너진 성벽의 일부를 덧대어 최근에 복원한 후금(後金)의 성문이다 <사진 황효진>

2. 동경성에서

요양에서의 첫 공식 행선지는 동경성(東京城) 남문이었다.

동경성 남문은 오래전에 무너진 성벽의 일부를 덧대어 최근에 복원한 후금(後金)의 성문이었다. 7세기 수·당과 맞장뜬 고구려인의 기상이 서린 요동성과는 다른 성이다.

동경성은 그 요동성이 무너진 자리 인근에 천년 뒤에야 세워진 신성(新城)이다.

누르하치는 1619년 사르흐 전역에서 조·명 연합군을 물리친 뒤 1621년 심양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요양으로 진공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그 파괴된 자리 인근에 동경성을 새로 지었다. 청 태조 누르하치는 그해 후금의 수도를 허투알라, 즉 흥경에서 요양으로 옮기고 동경성을 왕성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는 명은 물론 몽골과 조선 등 만주 동북지역의 여러 세력에 보다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1625년 수도를 다시 심양으로 옮겼다. 신성의 수명은 극히 짧았던 것이다.

그리 넓지 않은 동경성 남문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성문 벽에 붙어 있는 박물관에도 들어가 보았다. 박물관의 규모는 아주 작았지만 후금의 역사와 동경성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었다.

개축 전 동경성 남문

문득 이곳에서 벌어진 아주 특별한 역사적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1621년 광해군이 누르하치에게 보낸 사신 정충신(鄭忠信)과 사르흐 전투 때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姜弘立)과 김경서(金景瑞), 세 사람이 만나는 장면이다.

강홍립과 김경서는 광해군 시절 당시에도 후금에 투항한 장수로서 반신(叛臣)으로 취급받고 있었지만, 조선 조정에 수시로 장계를 올려 후금의 사정을 보고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강홍립과 김경서 등이 전해오는 후금의 동향을 통해 조선 조정도 요양 천도를 비롯한 정세 변화를 파악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조정 대신들과 의논하여 만포첨사 정충신을 공식 사신의 자격으로 요양 동경성에 보내 후금의 정세를 정탐하도록 하였다.

정충신은 누르하치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누르하치는 신하에게 지시하여 정충신이 사신의 숙소에서 강홍립과 김경서를 만나 밤새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였다. 정충신이 돌아와 보고한 내용에는 누르하치는 물론 홍타이지 등 황족의 근황과 후금 군사의 편성 체제까지 담겨 있다. 밤새 이어진 강홍립과 김경서와의 대화가 그에게 중요한 정보원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정충신의 후금 정탐 내용은 『광해군일기』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문득 의문 하나가 생겼다.

연암은 이 역사적 장면을 알았을까?

연암은 「고아홍마」에서 강홍립에 대해 관심 있게 언급하고 있지만, 강홍립을 사익에 눈이 멀어 조선을 등진 정명수와 같은 매국노의 반열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강홍립이 자기 가족이 처형되었다는 말에 분개하여 후금의 병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했다는 이야기도 별다른 비판 없이 전하고 있다.

사실 AI 비서(?)의 도움을 받아 가능한 범위에서 역대 연행록과 관련 연구 논문을 찾아보았지만, 다른 어떤 연행기에서도 위와 같은 사실을 기억하거나 회고한 글은 찾지 못했다. 이러한 사실에 미루어 보면 연암 역시 정충신의 후금 정탐 보고는 물론 그가 이곳 요양에서 강홍립과 김경서를 만났다는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만일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고아홍마」에서 강홍립을 바라보는 시선도 지금과는 조금 달라지지 않았을까.

400여 년 전 오랑캐의 새 수도 요동에서 이루어진 조선 관리들의 만남이 서글프다.

새삼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들도 지금의 나를 보았다면 함께 울었을까? 동경성에서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남문 밖 저 멀리서 집사람이 늦었다고 소리치며 손짓한다.

연주성 산성 유적지 소개문

3. 백암성 산성에서

다음 행선지는 고구려성 백암성이었다.

현지 가이드의 표정이 여느 날과 달리 아주 밝았다. 연암의 노정에서는 살짝 비껴간 곳이지만 자기가 특별히 선정한 고구려성을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생각에 다소 들뜬 모습이었다. 그는 중국교포였지만 누구보다도 만주의 고구려 역사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백암성, 다시 말해 연주성 산성 입구에는 여러 개의 출입 금지 안내판과 현수막까지 붙어 있지 않은가. 고구려 산성의 모습을 비교적 온전히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태자하 상류를 자연 해자로 삼은 백암산성은 단순한 유적지가 아니라 관광지구라고 했는데 말이다.

당황한 현지 가이드가 지역 주민에게 알아보니 산성을 보수한다는 이유로 몇 년 전부터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자유롭게 드나들었다는 그는 중국 당국이 이렇게 장기간 출입을 막고 있는 데 대해 아쉬움을 넘어 분노를 표출했다.

백암산성을 장기간 출입 금지하고 있는 속내를 알 것 같았다. 이곳을 안내하고 있는 커다란 게시판을 보는 순간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산성을 설명하는 글 가운데 하얗게 지운 곳이 더러 눈에 띄었다. 영락없이 ‘고구려’라는 말이 들어갔을 자리처럼 보였다. 동북공정이라는 네 글자가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여 년 세월을 건너 수천 리 먼 길을 찾아왔건만 문전박대당한 기분이다.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하니 불역낙호(不亦樂乎)라는 말은 허사였다. 공자가 호통칠 일이다.

울분을 삼키고 산성의 윤곽이나마 볼 수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과연 멀리서 바라보아도 고구려 산성의 위용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아 보였다.

때아닌 환각 증세일까? 1300년 이상 봉인된 고구려인의 함성이 한꺼번에 터져 나와 우리의 귓전을 때리는 듯했다.

백암성 원경

백암성은 645년 고·당 전쟁 때 성주 손대음(孫代音)이 당 태종에게 항복한 성이다. 주민들의 목숨을 살리고 성의 더 큰 파괴를 막은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결사항전한 요동성이나 끝내 당 태종의 발길을 돌려세운 안시성과 달리 백암성에는 오래도록 항복의 오명이 따라붙었다. 그 때문인지 백암성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일찍 희미해져 갔다. 조선의 사행단에게도 안시성과는 달리 그다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연암 역시 백암이라는 이름을 ‘배암’에서 온 것으로 보는 전승을 기록했을 뿐, 안시성의 경우처럼 그 위치를 집요하게 비정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러나 백암성주의 항복을 단순히 비겁한 배신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일까. 성 안에는 수많은 병사와 주민이 있었다. 영웅사관의 눈으로만 본다면 손대음의 항복은 용서받기 어려운 일이겠지만, 패배가 눈앞에 다가온 상황에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사직과 백성을 보전하기 위해 인조의 출성항복을 주장했던 최명길의 모습이 백암성주 손대음과 겹쳐 보이는 것은 왜일까?

묘한 일이다.

백암성의 성주 손대음은 역사 기록에 분명히 이름이 남아 있는데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거의 잊혀졌다. 반면 당대 기록에는 이름조차 남아 있지 않았던 안시성의 성주는 수백 년 뒤 어느 순간 ‘양만춘(楊萬春)’이라는 이름을 얻어 영웅으로 살아남았다. 연암을 비롯한 조선 시대 사신들의 연행록뿐만 아니라 2000년에 취역한 대한민국 해군함에도 양만춘이라는 이름이 소환되었다.

역사는 기록만으로 기억되는 것이 아닌 모양이다. 시대는 영웅을 부르고, 때로는 영웅의 이름까지 만들어내는가 보다.

‘판상형 돌다리’ 만보교

4. 만보교에서

우리는 요양에서 심양을 향해 가는 연암의 본궤도로 다시 진입했다. 낮고 아담한 판상형 돌다리 만보교(萬寶橋)가 그 이정표 역할을 했다.

만보교는 누르하치가 요동성을 함락한 1621년 무렵, 팔기군의 군수품과 식량 수송을 위해 기존 나무다리를 돌다리로 고쳐 놓았다고 전해지는 다리다. 이후 누르하치가 1625년 요양에서 심양으로 천도할 때도 이 길을 지나갔다고 한다. 연암도 만보교를 지나 십리하를 거쳐 혼하를 건너 심양으로 들어갔다.

만보교는 울창한 나무숲 끝자락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다리 밑으로 흐르는 물 위에는 하얀 꽃가루들이 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천상의 견우와 직녀가 한 번쯤 다녀갔을 법한 고즈넉한 돌다리였다. 그 옆으로는 거대한 빌딩 숲을 가로지르는 대교가 놓여 있었다. 작고 낡은 옛 돌다리와 거대한 현대식 대교가 한눈에 들어오는 모습에서 차원이 다른 온고지신의 정취도 느껴졌다.

그런데 이게 또 무슨 일인가. 다리 끝 편에 거대한 공사용 임시 가설물이 턱 하니 버티고 있지 않은가. 숨 막힐 일이다. 만보교에서 단체 인증샷을 찍고 차에 올랐다.

한층 도시화된 요양에서 246년 전 연암의 사행길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다. 그 대신 달리는 차 안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며 연암의 발자취를 추적할 길은 남아 있었다. 차창 밖을 바라보다 문득 연암 일행의 구첩(口妾) 이야기가 떠올랐다.

비장과 역관들은 말 위에 앉아 길가에서 눈에 띄는 여인들을 저마다 자신의 ‘첩’으로 점찍었다. 한족과 만주족 여인을 가리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찜한 여자는 다시 선택하지 못했다. 그들 나름의 상피법(相避法)이 제법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를 구첩이라 했다.-본문에서

만보교를 지나 십리하를 향해 가던 중 비장과 역관들은 말 위에 앉아 길가에서 눈에 띄는 여인들을 저마다 자신의 ‘첩’으로 점찍었다. 한족과 만주족 여인을 가리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이 먼저 찜한 여자는 다시 선택하지 못했다. 그들 나름의 상피법(相避法)이 제법 엄격하게 적용되었던 것이다. 이를 구첩이라 했다.

연암 자신도 이 심심풀이 구첩 놀이에 직접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다. 구첩을 숨기지 않고 기록한 그의 일기에는 솔직함과 해학이 넘친다.

연암이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심양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씻은 듯 아득하고 넓어서 한 점 거치적거리거나 막힌 데가 없는 곳”이었다. 연암은 앞서 요동벌판을 바라보며 호곡장을 외쳤지만, 심양벌판 앞에서는 전쟁터를 먼저 떠올렸다.-본문에서 <사진 황효진>

5. 심양에서

드디어 오후에는 혼하를 건너 심양에 도착했다.

연암이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심양은 “사방을 둘러보아도 씻은 듯 아득하고 넓어서 한 점 거치적거리거나 막힌 데가 없는 곳”이었다. 연암은 앞서 요동벌판을 바라보며 호곡장을 외쳤지만, 심양벌판 앞에서는 전쟁터를 먼저 떠올렸다.

“아하! 여기가 바로 영웅들이 수없이 싸웠던 전쟁터로구나.” 연암의 심양 도착 성명이다.

이어 심양이 천하의 안위를 좌우할 전략적 요충지임을 설파한다. 심양은 “청나라가 처음 일어난 곳으로, 동으로는 영고탑에 접해 있고 북으로는 열하를 제어하며 남으로는 조선을 어루만지고, 서쪽으로 중국을 향해 나아가니 천하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고 했다.

연암은 당시 천하가 백 년 동안 무사했던 까닭을 청의 덕과 교화가 앞 시대보다 월등했기 때문만으로 보지 않았다. 심양과 요동이라는 지정학적 조건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인다. 백 년 넘게 이어진 평화가 오히려 청 왕실에는 위험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때 말을 타고 천하를 얻었던 만주족이 너무 오래 안온한 생활에 젖으면 그 기세를 잃을 수 있다는 우려였다. 훗날의 청 쇠퇴까지 떠올리게 한다는 점에서 예사롭지 않은 통찰이다.

그런데 연암은 심양에 들어서자마자 천하대세를 논했지만, 정작 심양에서 그의 눈길을 붙잡은 것은 골동품 가게와 비단가게, 장사꾼들의 말과 행동, 초상 풍습 같은 살아 있는 일상이었다.

심양궁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둘러보는가 하면, 골동품 가게나 비단가게에 불쑥 들어가 현지 장사꾼들과 술을 마시며 필담을 나누었다. 기상새설(欺霜賽雪) 일화처럼 다소 당혹스러운 사오정 노릇도 하고, 초상 풍습을 구경하러 갔다가 얼떨결에 직접 문상까지 하는 촌극도 벌였다.

반면 그는 숭정전 앞에서 벌어졌던 나덕헌과 이확의 배례 거부 문제나 서문 밖에서 처형당한 삼학사, 심양에서 함께 구금되었던 김상헌과 최명길의 화해, 영조조차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던 조선관의 위치 같은 과거의 역사는 거의 소환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암보다 240여 년 뒤 심양을 찾은 우리 기행단의 관심사는 오히려 그가 지나쳐버린 과거의 심양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조선관에 8년 가까이 머물렀던 소현세자 내외의 활동, 병자호란 뒤 심양으로 끌려온 피로인들의 속환 문제 같은 것들이 우리에게는 더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연암은 과거의 심양보다 현재의 심양을 보았고, 우리는 연암이 지나쳐버린 과거의 심양을 찾아다니고 있었다.

우리가 심양에서 제일 먼저 달려간 곳도 피로인을 사고팔던 인시(人市)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남탑 일대와 조선관 터로 추정되는 남문 부근의 연립주택지였다.

그러나 심양에 피로인을 거래하던 인시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을 지금의 남탑 일대로 특정할 만한 실증적인 자료는 찾기 어려웠다. 더구나 남탑의 건립 연대와 피로인 속환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시기도 정확히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연립주택 주변 역시 실제 조선관의 터였음을 밝혀주는 확실한 자료는 찾기 어려웠다.

둘 다 호곡(號哭)할 심증의 장소에 불과했다.

마침내 심양고궁에 입성했다. 누르하치 시대의 대정전과 팔기군의 수장들이 자리했던 십왕정, 홍타이지의 숭정전, 『사고전서』가 보관되었던 문소각까지, 심양고궁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청 제국이 출발한 역사를 압축해 놓은 공간이었다. 봉황루 앞 솟대와 까치에 얽힌 누르하치의 전설, 효장문황후와 도르곤을 둘러싼 청 초기 황위 승계의 긴박한 이야기까지 떠올리고 보면 꼭 한 번 다녀올 만한 곳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심양고궁은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궁을 관람하는 것인지 인파를 구경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본문에서 <사진 황효진>

마침내 심양고궁에 입성했다.

누르하치 시대의 대정전과 팔기군의 수장들이 자리했던 십왕정, 홍타이지의 숭정전, 『사고전서』가 보관되었던 문소각까지, 심양고궁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청 제국이 출발한 역사를 압축해 놓은 공간이었다. 봉황루 앞 솟대와 까치에 얽힌 누르하치의 전설, 효장문황후와 도르곤을 둘러싼 청 초기 황위 승계의 긴박한 이야기까지 떠올리고 보면 꼭 한 번 다녀올 만한 곳임은 분명했다.

그러나 심양고궁은 그야말로 난리통이었다.

궁을 관람하는 것인지 인파를 구경하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도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찌는 듯한 더위에 사람들과 계속 어깨를 부딪치고 다니다 보니 몸은 극도로 지쳤다.

결국 인파 때문에 심양고궁 관람을 중도에 포기했다.

10여 년 전 친구와 함께 한가하게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던 기억을 되새기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웃픈’ 일이었다.

심양고궁을 빠져나오면서 김상헌과 최명길이 함께 갇혀 서로의 진심을 확인했던 구금 장소가 이 심양성 안 어디쯤이었을까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내게는 그곳을 비정할 능력이 없었다.

심양에 구금되어 있을 때 그들이 주고받은 시 몇 구를 떠올릴 뿐이었다.

김상헌이 최명길에게 보낸 시다.

成敗關天運

須看義與歸

雖然反夙暮

未可倒裳衣

權或賢猶誤

經應衆莫違

寄言明理士

造次愼衡機

성패는 천운에 달려 있으나

모름지기 의가 어디로 돌아가는지 살펴야 한다.

비록 아침저녁이 뒤바뀔 수는 있어도

어찌 치마와 저고리를 거꾸로 입을 수 있으랴.

권도는 어진 사람도 혹 그르칠 수 있지만

경도는 마땅히 뭇사람이 어길 수 없는 것.

이치를 아는 선비에게 말하노니

다급한 때일수록 저울질을 삼갈지어다.

이에 최명길이 화답했다.

靜處觀群動
眞成爛熳歸
湯氷俱是水
裘葛莫非衣
事或隨時別
心寧與道違
君能悟斯理
語默各天機

고요한 곳에서 뭇 움직임을 바라보니
마침내 원만한 귀결에 이르렀구나.
끓는 물과 얼음도 모두 물이고
갖옷과 칡베옷도 모두 옷이다.
일은 때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마음이 어찌 도에서 벗어나겠는가.
그대가 능히 이 이치를 깨닫는다면
말함과 침묵에도 각각 천기가 있음을 알리라.

도(道)는 경계에도 있지만 감옥에도 있었던 것일까?

결국 김상헌은 최명길의 권(權) 속에서도 충의를 발견했고, 최명길은 김상헌의 경(經)이 명예를 위한 고집이 아니라 죽음도 감수하는 진짜 절개였음을 확인했다.

원칙을 주장한 김상헌과 현실론을 펼친 최명길은 남한산성에서는 나라의 진로를 놓고 정면으로 맞섰다. 그러나 오랑캐 나라의 구금 생활 속에서는 의를 좇는 마음만은 둘 다 하나의 도에 이르렀음을 서로 인정하는 화해의 길이 열렸다.

두 사람의 화해를 지켜본 이경여가 이렇게 노래했다.

二老經權各爲公
擎天大節濟時功
如今爛熳同歸地
俱是南館白首翁

두 노인의 경과 권은 각각 달랐으나 모두 공을 위한 것이었고

하늘을 떠받친 큰 절개와 시대를 구한 큰 공이었네.
이제야 환하게 한 곳으로 함께 돌아왔으니
모두 남관에 갇힌 백발의 늙은이들이로다.
경과 권은 달랐지만 공을 향한 마음은 하나였다.

하루 종일 옛 전쟁터를 좇아온 끝에서 만난 것은 뜻밖에도 화해였다.

우리 시대에 울리는 심양의 종소리가 아닌가 싶다.

소현세자가 8년간 거주했던 ‘조선관’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열하일기 기행단이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다. <사진 황효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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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효진

공인회계사, 전 인천시 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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