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에세이] 깊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날들

깊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그날들이 오늘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주었다. 기다림과 결핍, 사람의 온기가 켜켜이 쌓여 마침내 삶의 결실로 익어가는 노년의 시간을 형상화한 이미지. <이미지 AI 생성>

지나간 시간을 돌아보면 참 더디고 뻐근한 세월이었다. 손끝 하나로 세상의 경계를 허무는 요즘의 눈으로 보면, 우리의 지난날은 미련하리만치 느리고 불편투성이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안다. 더뎠던 것은 부족함이 아니라, 무언가가 제 속도로 여물어가는 시간이었다는 것을.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까치발로 서성이던 길모퉁이, 동전 몇 개를 쥐고 줄을 서서 바라보던 공중전화 부스의 찢어진 광고, 풀칠한 편지 봉투가 먼 길을 돌아 닿기까지 뒤척이던 밤들. 답장 한 통을 받기 위해 며칠을 계산하며 살았고, 그 계산 속에는 초조함과 함께 은근한 설렘이 있었다.

그 막막한 여백 속에서 나는 배웠다. 누군가에게 닿기까지 걸리는 시간, 그 기다림이 삶에서 가장 깊은 결이라는 것을. 머리로 안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느끼며 알게 된 일이다.

기다림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 앞에서 나는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몸에 새겼다. 그래서였을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서도 조급해하지 않는 법, 오지 않는 것을 원망하지 않고 다만 기다리는 법을 그 시절에 배웠다.

요즘은 문자 한 줄이면 인연을 끊는 일도 어렵지 않다. 우리는 달랐다. 마음이 상하면 그 집 대문을 직접 두드렸고, 서운함과 미안함을 상대의 눈을 보며 건넸다. 관계의 온기를 차가운 액정이 아니라 체온으로 주고받았다.

쉽게 맺어지지 않았기에 깊었고, 깊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다투고 나서도 결국 다시 그 집 문 앞에 서야 했던 것은 관계를 끊는 일이 관계를 맺는 일만큼이나 수고로웠기 때문이다. 그 수고로움이 우리를 쉽게 등 돌리지 않는 사람으로 길러냈다.

새 옷은 명절이 되어서야 얻을 수 있었고, 외식은 한 해에 몇 번 없는 선물 같은 일이었다. 놀거리 하나 없이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던 심심함, 그 아득한 고요조차 돌이켜보면 내 안의 상상력을 키워준 가장 아늑한 그늘이었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기에 나는 스스로 무언가를 그려내야 했다. 마당의 흙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리고, 낡은 잡지 한 권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며 이야기를 지어내던 그 시절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지금처럼 혼자만의 시간을 견디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동생의 작은 손을 잡고 삶의 무게를 함께 나누며, 우리는 누군가를 탓하기 전에 먼저 어깨를 내어주는 법을 배웠다. 형제자매가 많던 집에서는 내 몫이 줄어드는 대신 나눌 사람이 늘었고, 나눌수록 정이 옅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짙어졌다.

결핍은 우리를 가난하게 만든 것만은 아니었다. 타인의 허기를 알아채는 넉넉한 눈을 남겨주었다. 동네에는 서로의 형편을 다 알면서도 굳이 입 밖에 내지 않는 어른들이 있었다.

옆집 숟가락 개수까지 안다는 말이 그저 우스갯소리가 아니었던 시절,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다. 누군가 아프면 온 골목이 알았고, 누군가 기쁘면 온 골목이 함께 웃었다. 그 촘촘한 이웃의 그물이 나를 키운 또 하나의 부모였다는 것을 이제야 뒤늦게 고백한다.

이제 우리는 푸른 잎 무성하던 청춘의 계절을 건너, 누런 잎 가득한 수확의 계절인 노년에 들어섰다. 원하는 것이 대부분 곧장 손에 들어오는 시대가 되었건만, 문득문득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아려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속도와 효율은 삶을 매끄럽게 할 수는 있어도 마음의 깊이나 영혼의 울림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빠르게 얻은 것은 빠르게 잊히고, 더디게 얻은 것만이 오래 곁에 남는다는 것을 나는 이 나이가 되어서야 겨우 말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걸어온 길은 한 번도 안락하거나 넉넉했던 적이 없었다. 거친 세파를 맨몸으로 맞았고, 때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어둠 속에서 묵묵히 걸어야 했다. 그러나 그 척박한 땅을 일구며 가슴에 새긴 인내와 감사, 사람에 대한 묵직한 신뢰가 우리라는 존재의 뼈대가 되었다.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서는 법만 익힌 것이 아니다. 넘어지는 일 자체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얻었다. 그 모진 계절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 단단한 내면도 없었을 것이다.

지나온 세월의 굽이굽이를 나직이 되짚을 때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묵직한 울림이 차오른다.

“나는 참으로 치열했고, 그래서 존엄한 삶을 살아냈구나.”

그 울림은 자만이 아니라 오래 참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조용한 확신이다.

물질은 빈곤했으나 마음만은 뜨겁게 타올랐던 그 시절을 지나온 나 자신에게, 그리고 같은 시절을 견디며 마침내 이 자리에 함께 서 있는 서로에게 진심 어린 찬사를 건네고 싶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대단했다”고 말해줄 자격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 불편했던 계절들은 단 한 순간도 허투루 사라지지 않았다. 숱한 기다림과 결핍, 그리고 사람의 체온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노년을 빚었다. 그러니 이 노년은 낡은 시간의 끝이 아니라 오래 익어온 삶이 맺은 열매다.

깊었기에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그날들이 오늘의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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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이

CCK 솔루션 고문, 전 경호처 경호이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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