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7~1789년 ‘경찰총감’ 14명…정보망을 만들었지만 혁명의 민심은 읽지 못했다. 정보원이 필요했다
왕은 언제나 배신과 반역의 위험에 놓여 있었다. 전쟁과 폭동 역시 왕권을 위협했다. 위험 요소를 미리 찾아내고 제거하는 일은 왕실의 안전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했다. 편지를 몰래 뜯어보는 통신 검열도 어느 나라에서나 기본적인 정보 수집 수단으로 활용됐다.
프랑스 파리 경찰청장은 광범위한 정보 수집 시스템을 구축했다. 감시망은 파리뿐 아니라 국내 주요 도시와 인접 국가의 수도까지 뻗어 있었다. 도청 장치나 인공위성이 없던 시대였으므로 사람을 활용하는 휴민트(HUMINT·Human Intelligence)가 최선의 정보 수단이었다.
경찰은 정보를 제공하는 협력자, 실제로는 밀고자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활용했다. 이들의 전과와 비리, 스캔들을 눈감아주는 대신 밀정으로 삼았다. 매월 일정한 보수나 용돈을 지급하며 첩보의 질을 높이기도 했다.
루이 15세가 제12대 파리 경찰청장 앙투안 드 사르틴(Antoine de Sartine)에게 물었다. “정보를 어떻게 얻는가?” 사르틴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파리 시내에서 세 사람이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 가운데 한 명은 제 정보원입니다. 특히 죄수와 하인, 하녀, 마부는 요긴한 소문을 물어오는 귀중한 정보원입니다.”
구소련 시대에 떠돌던 우스갯소리도 있다. 모스크바 거리에서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 가운데 KGB 요원은 몇 명일까? 둘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한 명은 누구인가? 폭정을 알지 못하고 그들과 어울리는 정신이상자라는 것이다.
122년 동안 14명이 맡은 경찰청장
파리 경찰총감 제도는 1667년부터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1789년까지 122년간 이어졌다. 모두 16대에 걸쳐 14명이 자리를 맡았다. 한 인물이 두 차례 재임한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임기는 가장 길게는 30년, 가장 짧게는 5개월이었으며 평균 재임 기간은 약 8년이었다.
이들 청장은 가문이나 파벌의 연줄만으로 자리를 물려받은 구시대 귀족과는 달랐다. 상공업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계층 출신도 적지 않았다. 당시 관직에는 가격이 매겨져 있었고, 왕의 승인을 받아 돈을 주고 자리를 사는 매관매직이 이루어졌다. 경찰청장 자리를 얻으면 귀족 작위가 함께 주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 돈을 주고 관직을 샀기 때문에 기존 귀족사회에 얽힌 인연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비리를 감싸주거나 눈치를 보아야 할 세력도 많지 않았다. 왕의 뜻만 살피면 됐으므로 소신껏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돈을 주고 산 자리라고 해서 신분이 보장된 것은 아니었다. 일 처리가 시원찮으면 왕은 곧바로 청장을 해임했다.
특히 식량 수급과 가격 관리는 중요한 임무였다. 밀가루 관리에 실패해 빵값이 폭등하면 즉각 자리에서 쫓겨났다. 불과 5개월 만에 해임된 청장도 있었다.
왕의 정부까지 관리해야 했던 자리
제8대 경찰청장 르네 에로(René Hérault)는 왕에게 올리는 일일 정보보고서를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였던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도 빠짐없이 전달했다. 왕을 움직이는 실력자의 심기를 세심하게 관리한 것이다. 그는 경찰청장 자리에 14년 동안 머물렀다.
제9대 청장 클로드 앙리 페도 드 마르빌(Claude-Henri Feydeau de Marville)은 에로의 사위였다. 그러나 그는 정보를 왕에게만 보고하고 퐁파두르 부인을 건너뛰었다. 퐁파두르는 이를 불경한 처사로 받아들였고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결국 마르빌은 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 마르빌이 장인에게 항의했을 법하다. “장인어른,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귀띔이라도 해주시지요.” 그러나 돌아올 답은 뻔했다. “그런 것까지 인계인수해야 하나? 알아서 해야지. 눈치가 없기는….”
소년 시절 루이 15세의 공식 정부가 된 퐁파두르 부인은 약 15년 동안 프랑스 궁정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파리 경찰청장은 그녀가 알아서 임명하거나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단순한 자리는 아니었다. 마담 드 퐁파두르는 감시에는 능했지만 민심에는 둔감했다
파리 경찰은 범죄자와 전과자를 정보원으로 활용했다. 이러한 관행은 프랑스 경찰이 이후에도 전과자를 정보원으로 이용하는 전통으로 이어졌다. 범죄 해결에는 도움이 됐지만, 범죄와 비리를 눈감아주는 과정에서 부패가 발생할 소지도 컸다. 파리 경찰은 유럽 최강의 정치경찰이자 사상경찰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정작 혁명의 씨앗을 뿌린 볼테르와 루소의 계몽주의 사상이 확산되는 데에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경찰청장들은 눈앞의 왕권 수호와 체제 유지에는 능했지만, 민심의 흐름을 읽는 데에는 미숙했다. 여론이 왕권 수호와 반혁명, 체제 유지로 향하는지, 아니면 왕권에 대한 반발과 인권 옹호를 거쳐 혁명으로 나아가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사회 밑바닥에 쌓이는 민심의 변화와 백성들이 느끼는 고통에도 둔감했다. 정보를 많이 모았지만 그 정보가 가리키는 역사의 방향은 읽지 못한 것이다.
정보의 귀재 사르틴과 마지막 청장 크론
제12대 경찰청장 사르틴은 1759년부터 1774년까지 15년간 재임했다. 루이 15세가 어디에서 그런 정보력을 지닌 인물을 찾아내고 검증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뛰어난 정보 전문가였다. 그는 경찰청장에서 물러난 뒤 해군장관을 지냈다. 프랑스혁명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스페인으로 이주해 72세까지 살았다. 그러나 프랑스에 남았던 그의 아들 부부는 혁명정부에 체포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마지막 경찰청장인 제14대 루이 티루 드 크론(Louis Thiroux de Crosne)은 1785년 임명됐다. 혁명 이전이었으므로 그 역시 돈을 주고 관직을 샀다. 크론은 유능하고 비교적 온건한 행정가였다. 파리에 넘쳐나는 빈민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고, 이들에게 일자리를 주는 공공근로사업도 시행했다. 온화하고 선량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789년 혁명이 발발하자 경찰청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1794년 4월 28일, 자신이 지키려 했던 체제와 함께 기요틴에 목을 내놓았다. 향년 54세였다.
파리 경찰청장의 운명은 프랑스 구체제의 운명과 다르지 않았다. 사르틴처럼 혁명의 기미를 알아차리고 해외로 떠난 사람은 살아남았지만, 크론처럼 혁명의 소용돌이에 남은 사람은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1667년부터 이어진 경찰총감 제도와 매관매직 관행도 프랑스혁명과 함께 막을 내렸다. 권력은 사적인 공간에서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어린 시절 귀족들의 권력 투쟁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귀족들이 왕국과 백성보다 자신의 파벌과 이익을 위해 싸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이 14세는 귀족의 힘이 왕권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각인시키고자 했다. 베르사유궁전은 이러한 정치적 구상의 산물이었다. 궁전은 단순한 왕의 거처가 아니라 왕실 정부의 중심이자 국왕 한 사람을 위한 개인숭배의 무대였다.
만찬과 무도회, 발레 공연과 불꽃놀이는 왕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정치적 행사였다. 국왕이 아침에 일어나는 기상 의식과 밤에 잠자리에 드는 취침 의식조차 궁정의 중요한 의례가 됐다. 신하들은 왕의 옷을 들고 서는 영예를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권력자의 사적인 공간에 얼마나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느냐가 또 다른 권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왕에게 기생하며 생겨나는 이른바 ‘근접 권력’이었다.
왕의 변기를 관리한 실세
영국에서도 16세기 이전부터 궁내부는 궁중 집행을 담당하는 체임버(Chamber)와 왕의 사적 공간을 담당하는 프리비 체임버(Privy Chamber)로 나뉘었다. 체임버는 왕실 전체의 재산과 국고를 관리했다. 프리비 체임버는 ‘체임버 안의 체임버’로 불리며 왕의 개인 금고와 신변에 관한 일을 담당했다. 국왕과 가까이 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프리비 체임버 근무자는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출신 성분이나 자격 요건도 일반 체임버 근무자보다 훨씬 높았다.
그렇다면 왕과 가장 가까이 지낸 사람은 누구였을까. 국왕의 전용 실내 변기와 용변을 담당한 ‘그룸 오브 더 스툴(Groom of the Stool)’이었다. 왕이 용변을 보는 동안 곁을 지키는 자리였지만 궁내부 서열은 매우 높았다. 업무만 보면 하찮아 보이지만 왕과 가장 은밀한 순간을 함께하는 인물이었다. 국왕에게 직접 접근해 사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고, 왕의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다.
왕의 변기를 관리하던 신하조차 권력의 실세가 될 수 있었다. 권력은 공식적인 직책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와의 물리적·심리적 거리에서도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