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혀끝의 경계, 언어는 어떻게 칼이 되었나’라는 글을 썼다. 관동대지진 당시 발음 하나로 사람을 가려내고, 그 혀끝의 몇 음절이 생사를 갈랐던 역사를 돌아보며, 언어는 사람을 나누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적었다.
며칠 뒤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보낸 이는 나보다 여섯 살 위이신 전라도 출신의 은퇴한 성형외과 의사 선생님이었다. “언어가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존재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한 문장만으로도 내 글은 이미 충분한 답을 얻은 듯했다.
선생님은 평생 서울말을 흉내 내려 한 적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싶지도 않았다고 했다. 몇 마디만 들으면 사람들은 “전라도 분이시군요.” 하고 알아차렸지만, 그것은 감추고 싶은 흔적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의 일부였다.
언어학에서는 이를 ‘언어 표지(language marker)’라고 한다. 억양과 발음, 말끝에는 한 사람의 고향과 성장 과정이 스며 있다. 그것은 원래 서로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였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는 그 표지가 사람을 가르는 경계가 되기도 했다. 구약성경의 판관기(사사기)에는 “Shibboleth”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 관동대지진에서도 혀끝의 몇 음절은 생사를 가르는 칼이 되었다.
그러나 선생님의 편지는 내게 언어의 또 다른 얼굴을 보여주었다. “나이가 드니 청력이 떨어져 목소리가 커집니다. 화를 내지 않아도 화난 것처럼 들리나 봅니다.”
청력이 감소하면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 점차 큰 소리로 말하게 되는 현상이 있다. 이를 롬바르드 효과(Lombard effect)라고 한다. 최근 AI 보청기를 착용한 뒤 주변에서는 “성질이 순해졌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성격이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편지의 마지막은 더욱 좋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리고 이어지는 한마디. “그래, 지금 이대로가 나야.”
젊은 날 우리는 더 좋은 말투를 배우려고 애쓴다. 더 세련된 발음을 익히고, 사투리를 감추려 한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남의 말을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목소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득 <My Fair Lady>가 다시 떠올랐다. 히긴스 교수는 발음을 바꾸어 엘리자의 운명을 바꾸려 했다. 그것도 하나의 진실이었다. 그러나 그 선생님의 편지는 또 다른 진실을 들려준다. 때로는 발음을 바꾸지 않는 용기가 한 사람의 삶을 더욱 아름답게 만든다고.
사람의 말에는 고향이 담겨 있고, 살아온 시간이 담겨 있다. 억양은 숨겨야 할 결함이 아니라 한 사람이 걸어온 길의 지문이다.
생각해 보면 혀끝은 참 이상한 곳이다. 어떤 시대에는 사람을 죽이는 칼이 되고, 어떤 날에는 오랜 친구를 알아보게 하는 온기가 된다. 달라지는 것은 혀가 아니다. 언제나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이다.
사람의 말은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살아온 세월이 남긴 가장 따뜻한 흔적일지도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