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칼럼

“태백중학교 열여덟 소년은 군번줄 목에 건 채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다”

태백중 학도병 <사진 황건>

먼 길을 달려 태백중학교 학도병기념관을 찾았다. 기념관은 태백중학교 운동장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다. 인조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고, 그 곁에는 충혼탑과 열여덟 명의 학도병 동상이 서 있었다. 총을 들고 전진하는 학생도 있었고, 수류탄을 움켜쥔 학생도 있었으며, 태극기를 높이 든 학생도 있었다. 청동으로 만든 동상들이지만 금방이라도 한 걸음 내디딜 것처럼 생생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동상마다 가슴에는 명찰이, 목에는 군번줄이 걸려 있었다.

태백중 학도병 이인성 군번줄 <사진 황건>

‘육군 0721900 이인성, 태백중학교 학도병.’ 짧은 문장이었지만 한 사람의 삶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이름과 군번만으로도 그는 더 이상 추상적인 ‘학도병’이 아니라 꿈을 가졌고 가족이 있었던 한 명의 소년으로 다가왔다.

1951년 1월 9일, 태백중학교 학생 127명이 자원입대했다. 그 가운데 열여덟 명이 전사했다. 나이는 열다섯에서 열아홉. 동상 아래에는 그들이 목숨을 잃은 여덟 차례의 전투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충혼탑을 중심으로 둥글게 배치된 열여덟 명은 7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무엇인가를 지키고 있는 듯했다.

태백중 학도병을 기리는 박종화 시인의 ‘전몰학도병에’ 시 <사진 황건>

충혼탑에는 박종화 시인의 ‘전몰학도병에’가 새겨져 있었다.

“아아 그대들 아내도 없고 아들도 없네,
그대들의 정기는 우리 겨레 모두가 이어받들리…”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한 교사의 흉상이 서 있었다.

태백중 학도병과 함께 참전한 박효칠 교사 흉상 <사진 황건>

그는 1951년 스물세 살의 태백중학교 교사였다. 제자들만 전장으로 보낼 수 없다며 함께 입대한 그는 같은 중대에서 제자들과 함께 싸웠고, 그들을 하나둘 먼저 떠나보내야 했다. 스물세 살이면 이제 막 자신의 인생을 시작할 나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미래보다 제자들과 함께하는 현재를 선택했다. 그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학교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사실은 더욱 깊은 울림을 준다.

태백중 학도병 <사진 황건>

기념관을 둘러보다 문득 ‘만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살아남은 전우들이 화백회(화랑태백회)를 만들지 않았다면, 만약 지역사회와 국가가 이들을 기억하려 애쓰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 이들의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기억되지 않는 희생은 얼마나 쉽게 역사 속에서 사라지는가. 역사는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될 때 비로소 살아남는다.

15살 꽃다운 나이에 태백중 학도병으로 나가 산화한 거룩한 이름들 <사진 황건>

문득 내가 그들 또래였을 때 학교에서 배웠던 노래 ‘대한의 아들’이 떠올랐다.

“나가자 씩씩하게 대한 소년아
태극기 높이 들고 앞장을 서서
우리는 싸우는 대한의 아들딸
무찌르고 말테야 중공 오랑캐”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는 가사다. 그러나 그 노래 역시 전쟁을 살았던 한 시대의 기억이다. 목이 메었지만 끝까지 불렀다. 노래를 부르는 동안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소년의 마음을 잠시나마 상상하고 있었다.

태백중 학도병 전사자 명단<사진 황건>

주차장으로 돌아가며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충혼탑 뒤편에는 붉은 장미가 피어 있었다. 전쟁을 기억하는 공간 한편에서 피어난 장미는, 이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평범한 일상을 조용히 상징하는 듯했다.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노는 소리와 장미의 붉은 빛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를 기억하게 했다.

우리는 종종 기념관이 과거를 붙잡아 두는 장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념관은 과거를 위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잊지 말아야 하는지를 묻는 공간이다. 태백중학교 학도병기념관에서 오래 발걸음을 떼지 못한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열여덟 명의 소년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군번줄에 남은 이름은 지금도 우리에게 조용히 묻고 있다.

태백중 학도병 <사진 황건>

“당신은 우리를 기억하고 있는가.”

태백중 학도병 <사진 황건>
태백중 학도병 127명의 늠름한 모습 <사진 황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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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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