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는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밤 하늘의 영롱한 별이 된 또 한 명의 군인출신 혁명가 이갑(호 추정, 1877-1917)을 만나게 된다. 이갑은 평안남도 평원군 출신으로 근대의 격동기에 출생한 부농의 아들이었다. 소년기에는 부친의 권유로 양반관료로서 입신을 꿈꿨으나, 시대의 모진 격랑에 막혀 인생 행로가 군인에서 혁명가로 바뀐 경우였다.

그는 격동의 시대에 근대의 눈을 뜨고, 일본에 유학하여 국력과 국방의 진가를 알게 된다. 일본 육사 15기(1902년)로 입학하고 1905년 금의환향해 대한제국 군의 초급장교로 출발한다. 작은 키에 단단한 신체와 강인한 정신의 소유자, 전도 유망했던 장교 이갑은 어떻게 우수리스크에서 40세에 한 많은 일생을 마쳐야 했을까?
이갑에게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여러 편 전해진다. 그는 가산이 풍족해 그의 서울 원서동 집은 일본육사 출신 장교들의 혁명 아지트였다. 서북(평안도, 함경도) 출신 항일운동가들은 인심 좋은 그의 집에 자주 모였다. 구한말 국난의 시기에 초급장교가 어떻게 큰 돈을 가질 수 있었을까?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그의 가족사다. 해방 후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한 이응준 중장(1891-1985, 일본육사 26기)이 그의 사위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의 군번 1번(10001)의 주인공, 이형근 (1920- 2002, 9대 육군참모총장) 대장이 이응준의 사위이므로 이갑에게는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명실공히 한국 무관 가문의 대명사라 할 수 있다.
시베리아에서 잠든 독립지사에게 이런 대단한 군맥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19세기 후반 그의 고향 평안도로 가본다. 평양에서 북쪽 60km 떨어진 교통요지인 평원군에서 그의 집안은 벼농사와 면화 재배로 성공한 지방의 향반이며, 호농이었다. 1888년, 고종은 아들 순종(1874년 갑술 생)과 동갑내기 소년들에게 특별시험을 베풀어 이른바 갑술과거시험을 시행하게 된다. 향반 자제로 영특했던 이갑은 부친의 성화로 나이를 세 살 올려 특별과거 시험에 합격해 소년진사라 불리게 된다. 이때 합격자는 1천여 명으로 왕세자(후일 순종)와 동갑의 소년(갑술 생)들에게 주어진 혜택이었다.
1천여 명이 합격한 뒤 조정에서는 부정합격자를 색출한다 하여 나이 3세를 올려 응시한 이갑은 합격이 무효가 되었다. 처벌은 이에 끝나지 않았다. 이갑 가문의 재산을 탐낸 평안도 관찰사 민영준(1852-1935, 민영휘로 개명)은 이갑의 부친을 감금하고, 석방을 미끼로 가문의 땅 40경(耕, 1경 5천 평, 약 20만 평)에 이르는 농토를 수탈하였다. 조선 말기 민비 척족의 악질적 부패 행태였다.
1897년 20세가 되던 해 이갑은 부친의 한을 갚고, 부조리한 사회를 엎어야 한다고 한양으로 가출한다. 3살 위인 차씨 부인과 결혼한 후 딸을 가진 가장이었다. 그는 한양 도성에서 벌어지는 독립협회 운동에 감동하며 참여하게 된다. 독립협회 간부들의 자강개혁과 자주독립에 자극받아 불의한 사회를 개혁해야 한다는 시대적 사명감에 더욱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평안도 고향 친구 김형섭이 일본육사(11기) 에 유학하고 있는 것에 자극을 받았다. 친구로부터 일본육사에 입학하는 길을 알았다. 1898년 자비로 유학하여, 일본육사 예비학교인 도쿄 세이죠중학교를 1901년 11월 마치게 된다. 이후 군대 실무를 1년 수료 후, 1902년 12월, 일본 육사 15기생으로 늦깎이로 입학(26세) 하게 된다.
동기생으로 유동열(임시정부 참모총장, 해방 후 통위부장/국방장관)이 포함된 8명이 임용되어 후일 이들은 대한제국 군에서 중추적 역할을 맞게 된다. 토지를 강탈당할 때부터 울화 병을 앓던 이 갑의 부친은 그가 육사 재학 중병으로 사망하고, 장례식에도 참석할 수 없어 그 원한이 골수에 박혔다.
이 갑은 1903년 11월 육사 졸업 후 견습사관으로 도쿄 근위사단에 배치되어 근무 중이었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근위사단이 참전하는 명령이 떨어진다. 조선인 출신 견습 사관들에게는 전선을 자유롭게 참관하는 것이 허락되어 만주 전선에 투입된다.
러일전쟁의 경험은 조선인으로서는 매우 값진 것이었다. 약소국 조선은 국력과 국방력이 없이는 신진 강국 일본에 대항할 수 없다는 뼈아픈 교훈을 얻었다.
1904년 8월 러일전쟁 종료 후 이갑과 육사 15기 8인은 모두 조선 군대에 복귀하여 참위(소위)로 임용되었다. 고종황제는 일본 육사의 정예교육과 러일전쟁 참전 경험을 높이 평가하여, 그들을 대한제국 군의 핵심요원으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일본 육사 출신들은 1905년부터 군대의 개혁과 일본식 군제로 근대화와 군사교육을 주관했다. 그들은 군 요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중견급 엘리트 장교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갑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시부터 1907년 6월까지 군부대신의 부관으로 발탁(군부대신 이근택, 권중현, 이병무) 되어 근무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대한제국의 부침과 망국의 그림자를 보며 1906년 6월 참령(소령)으로 진급하게 된다.
이갑은 참령(소령)으로 진급한 뒤 어느 날, 집안의 억울함을 바로잡아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판단했다. 평양관찰사 시절 그의 집안 재산을 불법적으로 강탈해 집안을 몰락시킨 민영준(개명 후 민영휘 이조 병조판서 등 역임, 휘문학교 설립자)을 찾았다. 왕실의 시종원경으로 권세가 꺾이지 않은 민영휘의 교동 거처로 아침에 단신으로 달려 들어갔다. 군복에 칼을 착용하고 가슴 속에 육혈포를 비장하고, 민영휘에게 정면 대면하였다.
“불법적으로 뺏은 우리 부친 재물을 반환하시오!” 재물 수탈을 부인하던 민영휘에게 탈취당한 토지문서를 제시하자, 민영휘는 몸을 피해 달아났다. 이후 두려움을 느낀 민영휘로부터 돌려받은 돈은 현찰 15만원(당시 금 1돈 가격이 2원50전, 쌀 1섬이 7-8원)이었다. 현재 시가로 약 150억-200억 상당의 자금을 돌려받은 것이다.
이 돈으로 창덕궁 옆 원서동에 집을 마련했다. 이 즈음 혈혈단신 상경한 평안도 출신 떠돌이 소년 이응준(1890-1985, 일본육사 26기 중좌, 초대 육군참모총장)을 만났다. 소년을 집에서 숙식시키고 보성학교와 대한제국 무관학교에 입학시켰다. 이응준은 이 인연으로 무관학교가 해산되면서 일본육사로 편입하는 기회를 잡았다. 인연은 계속되어 이갑이 해외로 망명 중에 이응준은 이갑의 딸 이정희와 혼례를 맺게 된다.
이갑은 남은 돈을 청년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자금을 지원했다. 중국으로 망명하는 자금을 이 돈에서 마련할 수 있었다. 그가 척신 민영휘와 대결하여 그의 재산을 돌려받은 경위는 당시 사람들에게 ‘의적 임꺽정’처럼 회자되었다. 이광수는 소설 <무명씨전>에서 이 일화를 이야기했다.
갑이 대한제국 무관학교로 보직 이동한지 2주 만에 헤이그밀사사건이 발생했다. 일본은 발끈하고 조선통감 이토는 분노에 차올랐다. 그들은 고종에게 책임을 엄중하게 추궁했다. 친일조직 일진회의 송병준과 이용구를 사주하여 고종의 양위를 선동했다. 총리대신 이완용은 일진회에게 공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오히려 고종의 책임론에 선수를 쳤다.
군부는 고종양위 선동에 강력히 반대하기로 하고 관련 대신들을 찾아 설득키로 하였다. 이갑이 주동이 되어 이완용, 이병무 등 찬성 대신들을 설득하고 여의치 않으면 무력봉기하여 대신들을 암살하려 했다. 정보가 누출되고 일본군의 방어조치로 실패하고 말았다.
관련자로 어담(시종무관실장), 이희두(군무국장) 이갑 등이 일본헌병대에 체포 구속되었다. 이들이 감옥에 있는 동안 ‘군대해산’이란 추가 조치가 나왔다. 군대해산은 그들 군인에게는 고종양위보다도 더욱 놀랄 조치였다. 감옥에서 석방된 이갑은 정상참작으로 참령으로 복직되었다.
그는 고종퇴위와 군의 해산이라는 절망적 상황에서 군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동기생 중 유동열과 남기창이 군문을 떠나고, 나머지 육사동기들은 계속 군부에 남았다. 이갑은 현역 군인으로 있을 때부터 우국지사들과 교분이 있었다.

1907년 동향인 안창호가 미국에서 귀국하며 만나고, 의기투합하여 비밀 항일운동조직 ‘신민회’를 결성하였다. ‘신민회’는 후일 상해 임시정부 출범의 주동적 역할을 했다. 이갑은 1908년 5월 군을 떠나 사회개혁과 신교육운동에 전념한다. 주로 평안도 함경도 출신 인사들과 교류하며 서우학회(서북학회로 발전)를 조직하고, 낙원동 소재 민가에 서우학교(서북협성학교, 현재 광신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르빈역에서 안중근에 의해 전 조선통감 이토가 암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일본헌병대와 경찰에 의해 신민회 비밀결사가 노출되고, 안창호와 이갑도 이토 살해사건의 배후로 체포 수감된다. 혐의가 없어 출옥 후, 신민회 간부들은 해외로 망명키로 결의한다.
안창호는 미국, 이동녕은 연해주, 이회영은 서간도, 이동휘는 북간도, 조성환은 베이징, 이갑은 유럽으로 떠나기로 했다. 이갑은 일본육사 재학 시부터 “조선은 대륙의 강국 독일과 러시아를 발전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세계전략론을 신봉하기 때문이었다. 중국 청도(칭따오)에서 회합한 그들은 각자의 행선지를 향해 떠났다.
이갑의 주장에 의하면, 망명 전에 고종황제를 만나 비밀연락을 지시받았다. “러시아 황제에게 보내는 친서와 블라디보스토크에 망명처가 가능한지”를 타진하는 것이었다. 러시아 측은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부정적이었다. 안창호, 이동휘 등과 협력하여 북만주에 독립군 기간요원을 양성하는 사관학교를 설립해 보려 하지만 자금 문제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러시아 입국 비자 문제가 해결된 후, 상해에서 기선으로 블리디보스토크로 향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소만국경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토지를 확보해 자립해 보려는 계획을 동지들과 시도했으나 벽에 부딪혔다. 그 즈음 한일강제합병 비보가 들려왔다.
연이은 실패와 좌절 속에 그는 원대한 구상을 다시 펼쳤다.

“가자 유럽으로!”
이갑은 항일운동의 본거지를 러시아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기기로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유럽과 연결되는 요지로 러시아 전역에 거주하는 조선인(고려인)의 구심점으로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시베리아횡단철도 중국 통과 루트(동중철도)가 개통되어 교통상 매우 편리했다. 동지들과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동한 그는 러시아어를 배우고 러시아 유력 언론 <노바야 보렘(신시대>에 기고하며 조선의 독립을 위한 대외활동에 집중한다.
이갑은 활동 중 전신마비 증세로 노상에서 쓰러졌다. 혹독한 추위와 과로 속에 신경쇠약으로 중병에 빠진 것이다. 마침 안창호가 미국으로 입국하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러 이갑을 만났다. 병이 위중한 것을 보고 미국으로 데려가려 했다.
안창호는 미국 도착 즉시, 이갑을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 주필로 초빙하는 명목으로 불렀다. 이갑은 독일 함부르크에서 기선을 타고 뉴욕에 도착했으나, 여독으로 병세가 악화되어 거동이 불가하였다. 뉴욕 이민관리사무소로부터 상륙불허 조치가 내려졌다. 불운의 연속이었다.
낙망 속에 그는 선회하여 다시 함부르크로 돌아갔다. 중병의 몸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즉시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상황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으나 가족에게 미치는 불이익을 생각해야 했다. 시베리아의 교통요지 치타를 거쳐 시베리아 횡단철도 하르빈 인근 북만주 무링으로 향했다. 무링은 하르빈에서 가까운 시골이었다. 안중근의 동생 안정근이 살고 있었다. 병중에서도 동지간의 연락과 독립군 사관학교 설립 계획을 추진했다.
1912년 4월, 그의 부인과 진명여학교에 재학 중인 외동딸 이정희(후일 이응준과 결혼)가 찾아왔다. 경성에서 신의주-단동-봉천(심양)-창춘-하르빈을 거쳐 수만리 먼 길이다. 여성의 몸으로 모녀가 기차와 역마로 연결하여 무링에 도착한 것이다. 아편 밀매상과 마적이 득실대는 동중철도(동청철도) 길은 독립투사 가족들에게는 눈물의 상봉 길이었다.
10여 년 뒤 일본육사 출신 독립투사 김경천의 아내 강정화가 위협을 무릅쓰고 남편을 만나러 온 그 길이기도 했다. 1913년에는 소설가 이광수가 방문했다. 이광수도 안창호의 초청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갈 예정이었다. 1차세계대전으로 이광수의 미국행은 바이칼호에서 무산되었다.
망국의 청년들!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전란 속에 요동치고 있었다.
1913년 가을, 이갑은 벽지인 무링에서 러시아 우수리스크로 이주했다. 조선인(고려인)이 다수 거주하는 우수리스크(당시 명칭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동한 것이다. 1914년 세계1차대전이 발생했다. 졸지에 러시아와 독일 간의 전쟁으로 비화되며, 일본과 러시아는 독일에 대항하는 동맹국이 되었다. 이후 독립운동 세력은 중국과 러시아 전역에서 활동이 극히 제한되었다. 지정학적 변화가 초래한 독립운동의 혹한기였다.
이갑은 우수리스크에서 더 이상 활동 공간이 없었다. 독립의 꿈은 멀어지고 신병은 더욱 깊어졌다. 헤이그밀사사건의 특사 이상설도 비슷한 시기에 병을 얻어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우수리스크에서 죽었다.
이갑은 3개월 뒤인 6월 13일 향년 41세로 숨을 거두게 된다. 이동녕, 안정근, 원세훈 등 동지들의 오열 속에 우수리스크의 공동묘지에 묻혀 시베리아의 별이 되었다.
1962년 3.1절, 정부는 그에게 건국공로훈장을 추서하였다.

일본육사는 1875년(1기) 프랑스사관학교를 모델로 도쿄에 설립되었다. 구한말부터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일본육사에 유학한 조선인은 124명(만주군 출신자 27명 제외)에 달한다. 그들은 대한제국 장교로 임용되어 식민지 일본군의 장교로 복무하거나 전사하였다. 이들은 해방 후 미 군정이 설립한 조선경비대 요원으로 창군 멤버가 된다. 일부는 항일독립투쟁에 투신해 순국하거나, 해방 후 광복군으로 금의환향한 케이스가 있다.
124명 중 주요인물로는 이병무(일본육사 8기, 중장/대한제국 군부대신) 어담(11기 중장/시종무관장)과 홍사익(26기, 일본군 중장 마닐라 포로수용소장/전범으로 처형) 영친왕 이은(29기 중장 항공군사령관)이 최고위급 장교였다.
이응준(26기 중좌/초대 육군참모총장, 이갑의 사위) 신태영(26기 중좌/ 국방부장관), 김석원(27기 중좌/육군 소장)과 만주사변(1932년) 이후에 입교한 채병덕(45기 소좌/육군 중장) 이종찬(45기 소좌 /국방부장관) 이용문(50기 소좌/육군소장) 김정렬(54기 대위 공군총장, 국무총리) 유재흥(55기 대위/ 국방부장관) 이형근(56기 대위/육군참모총장, 이응준의 사위)이 해방 후 한국군의 창군 멤버가 되었다. 이들 중 홍사익과 이은이 장군이 될 자격을 주는 엘리트 코스인 일본육군대학을 수료했다.
군복을 벗고 독립운동에 투신한 대표적 케이스는 노백린(11기, 임정 군무총장) 이갑(15기 참령)과 유동렬(15기, 임정 군무총장, 미 군정 통위부장/국방장관) 김경천(23기 대위,독립투사) 이청천(26기 중위, 광복군 총사령관) 이종혁(27기 중위, 독립투사) 등이었다.
만주군(만군)에서 일본육사로 편입한 케이스가 27명인데, 주요 인물로는 정일권(봉천군관학교 5기 일본육사 55기, 대장 국무총리),김석범(봉천 5기 일본육사 54기, 해병대사령관 중장) 박임항(신경군관학교 1기 일본육사 56기, 육군중장) 박정희(만군 2기 일본육사 57기, 대장 대통령) 이한림(만군 2기 일본육사 57기, 육군중장) 등을 꼽는다. 백선엽(봉천 9기, 육군대장) 신현준(봉천 5기 ,초대 해병대사령관) 윤태일(신경 1기, 육군중장 서울시장)은 만군 출신이지만 일본육사 편입자는 아니다.
만주군 출신들은 원리원칙에 투철한 일본육사파와는 달리 현실 전략에 뛰어나며 미군 고문관과의 협조에 능통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만군세력은 일본육사파를 압도하고 한국군의 최고 인맥이 되었고, 5.16군사혁명의 중심세력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