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구름은 흘러가고 강물은 흐른다…노병과 함께 부른 ‘하숙생’

민병돈 장군(오른쪽)과 황건 필자. 휘문고 22년 후배인 황건 필자가 자신의 저서에 ‘선배님께’라고 적어 민 장군에게 증정했다. <사진 이상기>

지난 6월 6~8일 나는 91세의 예비역 중장(이하 노병), 그리고 나와 동갑인 언론인 한 분과 함께 충북 영동의 한 펜션에서 2박 3일을 보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세 시간이 넘게 걸리는 곳이었다.

그 펜션은 특이했다. 삼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고, 그중 두 면은 접어 열 수 있었다. 문 하나만 열어 놓아도 바로 아래로 흐르는 물한계곡의 물소리가 실내까지 들려왔다. 산속의 바람과 물소리가 자연스럽게 드나드는 집이었다.

황건 교수와 민병돈 장군 <사진 이상기 기자>

점심 식사를 마친 뒤였다.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던 중 노병이 문득 독일의 작가 헤르만 헤세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육군사관학교 생도 시절 헤세의 <싯다르타>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다. 그 영향으로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훗날 결혼식 주례도 조계사의 스님에게 부탁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독일 유학 시절로 이어졌다. 그는 대위 시절 독일에 유학해 1년간의 교육 과정을 마쳤고, 귀국 후 얼마 동안 육군사관학교에서 독일어를 가르쳤다고 했다. 그러면서 괴테의 <파우스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파우스트는 희곡이면서도 시야. 그래서 구절 번호(verse number)로 인용하지.”

노병은 젊은 괴테가 질풍노도(Sturm und Drang) 시절에 쓴 <우어파우스트(Urfaust)>와,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세월을 거쳐 완성된 최종본 사이의 차이를 설명하였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그의 기억은 또렷했고, 독일 문학에 대한 애정도 여전하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다가 몇 년 전 독일 라이프치히에 한 달 반 정도 머물렀던 일을 떠올렸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등장하는 유명한 술집 아우어바흐 켈러(Auerbachs Keller)를 찾아갔던 경험을 이야기했다. 노병은 반가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 내 기억에 가장 오래 남은 것은 괴테도 아니고 라이프치히도 아니었다.

노병은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헤세의 구름 이야기를 꺼냈다. 구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인생을 말하지 말라는 뜻의 이야기를 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민병돈 장군(오른쪽)과 황건 교수가 최희준의 ‘하숙생’을 부르고 있다. <사진 이상기>

나는 웃으며 말했다. “헤세도 좋지만 가까이 최희준도 있지요.” 그리고 곧바로 노래를 불렀다.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최희준의 ‘하숙생’이었다. 그러자 노병이 따라 불렀다. 동석한 언론인도 따라 불렀다. 잠시 후 우리는 셋이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헤세의 구름과 ‘하숙생’의 나그네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니었다. 구름은 흘러가고, 나그네는 길을 떠난다. 강물도 쉼 없이 흐른다.

그날 오후 펜션 안으로는 계속 물한계곡의 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싯다르타>의 뱃사공 바스데바를 떠올렸다. 그는 강물의 소리를 들으며 깨달음에 이르렀다. 강물 속에서 수많은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는 ‘옴(Om)’의 소리를 들었다.

물론 나는 해탈하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는 생각하였다. 육사 생도 시절 헤세를 읽던 그 청년은 독일에 유학을 다녀왔고, 독일어를 가르치는 교관이 되었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 이제 아흔한 살의 노병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구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창밖에서는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하숙생’을 부르고 있었다. 구름은 흘러가고 강물은 흐른다. 사람도 결국은 잠시 머물다 떠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인생이라는 여관에 묵고 있는 하숙생들인지도 모른다.

민주지산 물한계곡 <사진 이상기 기자>

가수 최희준씨의 ‘하숙생’ 유튜브

최희준 – 하숙생 (1966) 가사.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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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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