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와이오밍주 케머러(Kemmerer)에서 비경수로형 첨단 소형모듈원전(SMR) 건설이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고 있다.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NRC)가 올해 3월 빌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TerraPower)의 나트륨(Natrium) 원전 건설을 승인하면서, 미국 원자력 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다.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수십 년간 사실상 멈춰 있었던 미국 첨단 원전 건설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케머러 프로젝트는 2030년 준공과 이후 시운전을 거쳐 상업운전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다.
이 사업은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가 설립한 테라파워가 주도하고 있다. 게이츠는 2023년 현장을 방문해 “어떤 청정에너지원도 원자력만큼 안정적이지 않고, 어떤 안정적인 에너지원도 원자력만큼 깨끗하지 않다”며 “이곳에 건설되는 원전이 지역경제와 미국의 에너지 자립, 기후변화 대응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주목할 점은 이 같은 구상에 한국 기업들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SK㈜와 SK이노베이션은 2022년 테라파워에 약 2억5000만 달러를 투자해 주요 전략적 투자자로 참여했으며, 국내 원전 기업들도 부품 공급망 구축에 나서고 있다.
케머러에 건설되는 나트륨 원전은 기존 경수로와 다른 비경수로형 원전이다. 일반 원전이 물을 냉각재로 사용하는 것과 달리, 이 원전은 액체 나트륨을 사용하는 소듐냉각고속로(Sodium-cooled Fast Reactor, SFR)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특히 기본 출력은 약 345메가와트(MWe) 수준이지만, 에너지 저장 시스템을 결합해 최대 500메가와트급 출력 운용도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액체 나트륨은 약 880도에 이르기까지 끓지 않는 특성을 지녀 고압 상태를 유지할 필요가 없으며, 수동 안전계통(Passive Safety System)을 적용해 비상 상황에서도 자연 냉각이 가능하도록 설계됐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제1원전에서 발생했던 전원 상실 사고와 같은 위험을 줄일 수 있도록 설계된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SMR은 차세대 원전 가운데서도 안전성이 높은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출력 조절이 비교적 용이해 전력 수요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으며, 공장에서 모듈을 제작한 뒤 현장에서 조립하는 방식이어서 장기적으로는 건설 기간 단축과 비용 절감 효과도 기대되고 있다. 이와 함께 기존 대형 원전에 비해 부지 규모가 작고 안전성이 높아 주민 수용성을 확보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워, 원전 건설 과정에서 나타나는 이른바 ‘님비(NIMBY·Not In My Back Yard) 현상’을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기업들의 역할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두산에너빌리티와 HD현대 등은 주요 부품 공급망 구축에 참여하고 있으며, 향후 글로벌 SMR 시장 확대와 함께 국내 원전 산업 생태계에도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한국은 이미 세계적인 SMR 기술 기반을 갖추고 있다.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개발한 SMART(System-integrated Modular Advanced ReacTor)는 2012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기준에 따른 세계 최초의 소형모듈원전 표준설계 인가를 획득한 바 있다.
비록 테라파워의 나트륨 원전과 SMART는 적용 기술과 노형은 다르지만, 한국이 축적해 온 SMR 설계와 운영 기술은 향후 세계 시장 진출의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SMART 개발 과정에서 냉난방 시스템과 해수담수화 기술 등 다양한 응용기술이 함께 개발되었다는 점도 우리나라 원전 기술의 잠재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인공지능(AI)과 로봇 산업의 급성장, 데이터센터 확산, 전기차 보급 확대, 그리고 기후변화 대응을 위한 탄소중립 정책은 전 세계 전력 수요를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이에 따라 글로벌 빅테크 기업과 각국 정부들도 안정적이고 탄소 배출이 적은 차세대 전원으로 SMR에 대한 관심과 투자를 확대하고 있다.
세계경제포럼(WEF)을 비롯한 여러 국제기관들은 향후 SMR 시장이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으며, 차세대 데이터센터와 대규모 산업단지, 그리고 전력 인프라가 부족한 개발도상국에서도 활용 가능성이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경기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와 같은 초대형 산업단지의 안정적 전력 공급원으로, 그리고 해외 원전 수출 산업의 새로운 축으로 SMR을 적극 육성할 필요가 있다.
과거 한국 원전 산업이 세계 최고 수준의 시공 능력과 운영 경험으로 경쟁력을 입증했다면, 앞으로는 소형모듈원전이 대한민국 원자력 산업의 새로운 효자 수출 품목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이 충분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