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하는 예배, 전시된 하나님

“여호사밧이 그의 아버지 아사의 모든 길로 행하며 돌이키지 아니하고 여호와 앞에서 정직히 행하였으나 산당은 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아직도 산당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열왕기상 22:43)
열왕기는 여호사밧의 업적과 한계를 간략히 기록하고 있지만, 역대하에는 그의 이야기가 조금 더 자세하게 나옵니다. 여호사밧은 왕권을 확립하고 국방을 튼튼히 하여 나라의 기틀을 든든히 다졌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유다 전역에서 우상을 제거하고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지방에 파견하여 백성에게 바른 신앙의 길을 가르치게 한 것은 그의 가장 빛나는 업적입니다. 그러나 그가 끝내 손대지 못한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산당을 제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제거하는 일은 비교적 쉽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산당 제거에는 ‘굳이 그럴 것까지야’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산당은 그대로 두고 거기서 하나님을 잘 섬기면 되는 것 아니냐’ 말할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가 산당에 손을 대기 전까지 대부분의 왕들은 그 앞에서 멈추어 섰습니다. 사람들의 일상 곳곳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종교성까지 뿌리 뽑는 일이 그만큼 어려웠던 것입니다.
산당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습니다. 오랜 시간 몸에 밴 예배의 형식이자 구조였습니다. 말하자면 일종의 플랫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상을 숭배하던 플랫폼은 그대로 두고 콘텐츠만 예배로 바꾸어 보려 했습니다. 바알이 있던 자리에 하나님만 모시면 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반대였습니다. 콘텐츠가 플랫폼을 바꾼 것이 아니라 플랫폼이 콘텐츠를 변질시켰습니다.
하나님을 이방 신 대하듯 섬기는 풍조가 생겼습니다. 오늘날이라고 다를까요? 예배는 시청의 대상이 되고, 찬양은 감정의 분출구가 되고, 말씀은 취향에 따라 소비되는 콘텐츠가 되고, 교회는 기분 전환의 장소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은혜 받았다는 말과 기분 좋아졌다는 말이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우상을 하나님처럼 섬기는 것도 우상 숭배이지만 하나님을 우상처럼 섬기는 것도 우상 숭배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플랫폼 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까요? 샤머니즘의 플랫폼, 유교적 가치관의 플랫폼, 자기계발과 자기 성취의 플랫폼 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라면, 내가 섬기는 대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나’일 수 있습니다. ‘나’라는 플랫폼이 깨지지 않으면 어떤 콘텐츠를 올려도 결국 나를 섬기는 예배가 됩니다. 복음이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