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

[황건 칼럼] 돌아온다는 약속, 그리고 새로워진 삶…’성주간'(聖週間)에 외과의사가 묵상한 부활

렘브란트 작 <엠마오에서의 식사>(유화, 1648).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는 바로 그 순간을 옮겼다.

사람은 떠난다. 그리고 돌아오기를 약속한다. 그 약속은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신앙 속에서 반복된다.

“나는 돌아오리라 (I shall return).”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1942년 필리핀을 떠나며 남긴 이 말은 단순한 군사적 선언이 아니었다. 그것은 패배 속에서 던진 약속이자, 시간의 저편을 향한 의지였다. 그리고 2년 뒤, 그는 실제로 돌아왔다.

세월이 흐른 뒤, 이 문장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시 등장한다.

영화 <터미네이터>(The Terminator) 속 슈왈제네거(Arnold Schwarzenegger)는 “I’ll be back”이라고 말한다. 짧고 건조한 이 문장은 감정도 신념도 없이 예정된 귀환을 선언한다. 인간의 결의가 아니라 기계의 반복이다.

그러나 이 두 문장 이전에 더 오래된 약속이 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말한다. “내가 다시 오리라 (I will come again).” 이 문장은 헬라어 원문에서 πάλιν ἐλεύσομαι라고 기록되어 있다. πάλιν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ἐλεύσομαι는 ‘돌아온다’기보다 ‘다가간다’는 방향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약속은 “나는 돌아오리라”라기보다 “나는 다시 너희에게로 간다”에 가깝다.

맥아더의 귀환이 장소를 향하고, 터미네이터의 귀환이 기능의 반복이라면, 그리스도의 귀환은 사람을 향한다. 그것은 복귀가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며, 반복이 아니라 약속이다. 이 약속은 죽음을 통과한 뒤의 귀환, 절망을 지나 부활로 이어지는 사건이다. 성주간(聖週間)은 바로 그 시간이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귀환’을 서로 다른 층위에서 경험한다. 맥아더의 귀환은 역사 속에, 터미네이터의 귀환은 기계적 시간 속에, 그리스도의 귀환은 구원의 시간 속에 있다. 이들은 닮아 있지만, 하나는 의지이고 하나는 프로그램이며 하나는 약속이다.

외과의로서 나는 ‘돌아옴’을 또 다른 방식으로 본다. 부서진 얼굴을 맞추고, 끊어진 기능을 회복시키며, 환자가 일상으로 돌아가도록 돕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환자가 ‘이전의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흉터는 남고, 감각은 변하며, 기억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돌아오는가.

성주간은 이렇게 답한다. 돌아옴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변형된 상태로 다시 존재하는 것이다. 부활은 복원이 아니라 변형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오리라”는 말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한 약속이 된다.

이번 성주간,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그 ‘돌아옴’은 어디를 향한 것인가. πάλιν ἐλεύσομαι. 그 말은 “다시 오겠다”가 아니라 “나는 다시 너희에게로 간다”는 관계의 언어다. 그렇다면 우리의 귀환 역시 어떤 장소가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갈 수 있다. 누군가에게로, 다시. 성주간은 그 길을 조용히 가리킨다. 귀환이 아니라, 다가옴으로.

나는 외과의로서 완전한 ‘복귀’는 없다는 사실을 안다. 다만 우리는,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다시 삶을 향해 나아갈 뿐이다. “나는 돌아오리라.” 이 오래된 말은 이제 “나는 다시 너에게로 간다”는 더 깊은 약속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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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건

이대 해부학교실 초빙교수, 인하의대 명예교수, '인류의 전쟁이 뒤바꾼 의학세계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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