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재벌, 이 정도인가
요즘 여러 재벌가에서 벌거벗은 모습을 보여주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비자금을 만들어 해외로 빼돌리는 것은 예사인 데다 원정출산에 자녀의 편법입학 의혹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사건들이 꼬리를 물면서 이어지고 있다. 세계적으로도 꿀릴 데 없이 떵떵거리는 한국 재벌들인데, 그들의 수준이 과연 이 정도밖에 못 미치는 것인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독립적인 국제탐사언론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꾸려 자금을 도피시킨 재벌가의 실상이 당분간 더 그늘에 묻혀 있었을 것이다. 카리브해의 외진 나라에, 그것도 간판이나 사무실도 없이 서류상으로만 회사를 세운 것이라면 추적이 쉬울 리 없다. 버진 아일랜드에서만 240여명의 한국인들 명단이 드러났다니 그 근처의 바하마나 버뮤다, 케이먼 제도까지 들춰낸다면 그 숫자는 훨씬 더 늘어날 것이다.
그들이 해외에서 호화 별장을 사거나 재산을 주고받는 게 잘못됐다는 얘기가 아니다. 자기 돈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내법을 벗어나 불법자금을 세탁하고 탈세를 저질렀다면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 개미 투자자들을 울려가며 주가조작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빼돌렸다는 정황이 드러나기도 했다. 실체도 없는 종이쪽지 회사를 통해 자식들에게 재산을 통째로 넘겨주려는 교묘한 수법도 포착되고 있다.
물론 아직은 진상이 밝혀지지 않아 탈세 여부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온 나라가 경제적 고통을 겪던 무렵에 우르르 자금을 빼돌렸다는 자체만으로도 변명이 통하지 않게 되었다. 경제단체장을 지낸 명망가로부터 대학 총장, 유명 연극인까지 두루 명단이 확인되는 마당이다. 어느 금융계 인사는 주가 시세조작 혐의로 수배령이 내려지자 해외에 도피하면서도 페이퍼컴퍼니를 세웠다고 한다. 우리 사회에서 돈푼깨나 있다는 사람들의 맨얼굴이 아닐까.
어느 재벌가 따님의 하와이 원정출산 논란은 더욱 가관이다. 회사 고위직의 신분으로 출산을 앞두고 미주지역 본부로 발령을 받았다는 사실이 더욱 웃기는 얘기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제대로 근무하다가도 출산에 임박해서는 오히려 휴가를 받아 쉬는 것이 정상이다. 아마 이 재벌가에서는, 마흔을 바라보는 만삭의 임산부라도 비행기를 이용하기만 한다면 괜찮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아들 쌍둥이를 낳았다고 하는데, 이들에게는 속지주의를 택하는 미국법에 따라 미국 시민권이 주어지게 된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따가운 눈총이 쏠리게 되자 이 신생아들이 성장하게 되면 군복무를 포함한 한국민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다하도록 할 것이라는 회사측의 발표가 있었지만 그 진정성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원정출산이라면 재벌가의 며느리로 들어간 유명 아나운서 출신의 몇 해 전 사례가 없지 않다. 첫째 아이와 둘째가 모두 그런 식이었다. 이 전직 아나운서께서는 더 나아가 자녀의 외국인학교 부정입학 사태에까지 관련됨으로써 더욱 논란을 부채질하고 말았다. 미국에서 낳은 자식이었기에 당연히 외국인학교에 들여보내야 된다는 생각이었을까.
그런데, 자격이 안되는데도 억지로 입학을 시킨 것이 문제였다. 탤런트 출신인 전직 대통령의 며느리를 포함해서 내로라하는 다른 재벌가와 유명 관광회사, 제약회사, 성형외과 원장 집안도 비슷한 경우로 적발되었다. 알선 브로커를 통해 과테말라, 온두라스 등의 위조여권을 구입하거나 외국 국적을 얻으려고 외국인과 위장 결혼하는 수법들이 동원되었다. 외국인학교에 들여보내려면 일정한 자격이 필요하지만 돈으로 그 요건을 해결하려 했던 것이다.
이번에 서울의 어느 국제중학교에 아들을 들여보냈다가 자진퇴학으로 마감한 국내 최대 재벌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배려대상자로 편법 입학했다는 사실 자체가 넌센스였다. 정말로 배려를 받아야 하는 다른 학생이 떨어졌다고 상심하며 울먹이는 사이에 이 집안에서는 축하 모임이라도 열렸는지 모를 일이다. 기업경영에서 만만한 틈새가 엿보일 경우 언제라도 끼어들 태세를 보여준 증거로 파악한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재벌가 인사들의 그릇된 처신은 이들을 주시하는 국민들에게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쥐어뜯게 만듭니다. 문제의 국제중학교에서 점수가 모자라는 학생 몇 명이 주관적 영역에서 만점을 받아 합격됐다는 사실은 또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자기 아이들에게 정직하고 열심히 살라며 타일렀던 보통 부모들에게 재력과 권력이 원칙이나 상식보다 앞선다는 현실의 장벽을 다시금 되새겨 주고 있다.
우리 사회가 지도층 인사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바라지 않게 된 것도 이미 오래전의 일이다. 수시로 드러나는 뇌물사건과 성접대 등 갖은 향응에 이르기까지 그들끼리의 은밀한 거래를 대략은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거래관계의 마찰을 빚어 야구 방망이로 폭행하고는 매값으로 처리하려던 경우나 아들과 다툰 가해자들을 불러다 가죽장갑을 끼고 주먹을 휘두른 재벌 총수의 사례도 뚜렷이 기억되고 있다.
돈으로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생각은 위험하다. 명예와 권력조차도 돈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인식이다. “돈이면 처녀 불알도 산다”고 했지만, 그것은 그런 생각이 잘못됐음을 지적하는 반어법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기업들이 아무리 이웃돕기 성금을 내고 윤리경영을 강조해도 감동의 울림이 전해지지 않는 것이 그런 까닭이다. 그보다는 재벌의 신뢰도 회복이 먼저다.
한꺼번에 터져나온 재벌가의 여러 논란거리들이 특권 부유층 주변의 부적절한 관행들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적어도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겉으로는 점잖은 척하면서 뒤로는 호박씨를 깐다는 인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재벌들이 국민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시대는 요원하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