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 칼럼] ‘김정일 시대’가 남긴 것들

지난 2010년 11월13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故김정일 국방위원장(왼쪽 세번째)과 김정은 북한 노동당 제1비서(오른쪽)가 인민군 제3875 부대를 시찰했다고 보도했다. <자료사진=신화사/뉴시스>

김정일이 갑작스레 사망한 지 1년이 지났다. 그러므로 이젠 사망한 독재자에 대해 몇 마디 해도 나쁘지 않은 시기일 것 같다. 또 그의 단점보다는 그의 성격이나 정치의 긍정적인 면에 초점을 맞춰볼 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 글에서도 밝히겠지만 김정일도 긍정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필자는 탈북자들과 주기적으로 만나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과의 대화 중 특기할 만한 점은 대부분의 주민들이 김일성에 대해 진정으로 존경하고 있다는 것이다.?이는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 발생한 기근, 경제 붕괴, 지속적 경제 위기에 책임이 있는 김정일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시각과는 크게 대조적이다. 일반적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은 나라를 세우고 인민을 수호한 위대한?사람으로 비춰지지만, 그의 아들은 그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런?인식이 오산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 가는 부분도 있다. 한국전쟁 후 북한은 김일성 시대(1953~1994) 초기에 짧지만 빠른 경제 성장을 경험했다. 이후 침체의 길을 걸었지만 말이다.?김일성의 능수능란한 외교정책은 소련과 중국의 원조를 이끌어냈고, 이 원조는 북한 체제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역할을 했다.

일반적으로 북한 주민들에게 김일성 시대는 예측이 가능한 탄탄한 시기였다.?테러 위협이 많았던 이 시기에 ‘아버지같은’ 지도자의 보살핌 아래에서 거의 완벽한 경찰국가가 탄생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당시 먹고 살기에 충분한 음식을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기억하는 대중에게 쉽게 잊혀졌다.

1990년대 초 극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북한 여론은 국가 상황을 악화시킨 김정일을 탓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말하면 김정일은 실질적으로 1990년대 초의 경제적 재앙과?100만 북한 주민의 목숨을 앗아간 기근에 대해 거의 책임이 없었다.

이 기근은 전적으로 김일성 정책의 결과였다. 그는 스탈린주의 농업정책을 도입했고, 모든 농민들을 국가가 운영하는 ‘집단농장’에 투입시켰으며,?개인 소유의 땅은 모두 국가가 환수했다. 소련과 중국의 원조가 가능한 만큼은 생산이 가능하도록 화학비료에 의존하는 농업체계도 만들어냈다. 원조 없이는 불가능한 전력생산을 주장한 것도 김일성이었다. 이 모든 것들과?함께, 기근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김정일의 실책이 아니었다.

김정일은 1996년부터 시작된 기근을 손 써보려 했고, 그 해결책은 중국과 베트남의 경험에서 찾았다(베트남은 1980년대 중반 기근을 경험했지만, 10년 뒤 세계 3위 쌀 수출국이 됐다). 이를 위해 집단농장을 해체해야 했고,?농민들이 자기 땅을 소유하고 수확물을 직접 처리할 수 있도록 허용해야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이 방법을 쓰지 않았다. 옳든 그르든 그런 변화는 분단 상태의 한반도에서 정치적 위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김정일은 축출 당하고 싶지 않았고, 이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과도 다르지 않았다. 김정일은 체제 안정성을 위해 아버지의 농업정책을 이어받아 주민들을 희생시켰다. 이런 정책 결정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기근의 원인 제공자는 김정일이 아니다.

김정일에게 면피의 여지를 준다면, 체제 생존의 위기였지만 유연성을 보였다는 점이다. 김정일은 암시장을 눈감아줬고, 불법 개인 경작도 모른 척 했다. 또 그동안 북한이 아무 문제 없는 지상낙원이라는 선전도 거뒀다. 자존심을 접고 북한의 지독한 식량난을 인정한 채 해외 원조를 요청했다. 물론 세계의 관심과 원조를 얻기 위해 핵과 미사일을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북한은 점차 기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2000년대 초부터는 대부분의 북한 주민들이 영양부족 상태이긴 했지만 기아에 시달리는 일은 드물었다.

김정일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또 다른 사실은 국내 정치 테러에 대한 조치를 상당히 완화했다는 점이다.?북한은 정치적 반동을 이유로 15만명이 감옥에 갇힌, 세계에서 가장 탄압이 심한 국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탄압은 김일성 시대보다 크게 줄었다. 이런 현상은 뇌물제공자에게 처벌을 면해주는 북한 내부의 부패가 원인이었지만, 상대적으로 관대한 법 때문이기도 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정치에서의 연좌제를 부분적으로 폐지했다는 것이다. 김일성 시대에는 정치범뿐 아니라?직계 가족도 모두 감옥에 끌려갔다. 1990년대 중반, 이 악명높은 법은 중단됐다.?여전히 범죄자와 가족들이 함께 투옥되기도 하고, 일상생활에서 범죄인의 가족들에게 심각한 차별이 이뤄지지만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혼자 감옥에 간다.

또 다른?신호는 중국으로 국경을 넘는 사람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관대하게 처벌한다는 점이다. 김일성 시대에는 탈북이 심각한 범죄로 취급돼 몇 년간의 감옥살이를 해야 했고, 이후 평생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김정일이 주도권을 잡으면서 태도가 바뀌었다. 많은 탈북자들은 감옥 대신 수용소에서 몇 주나 몇 달을 보냈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탈북자 수가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낳았지만 이는 김정일의 직접적인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정일은 급속히 늘어나는 사설 시장에 대해서는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지 몰랐다. 그와?참모들은 시장 경제를 인정하는 것과 개인사업을 없애려는 시도 사이에서 고민했다. 결국 김정일은 사적인 경제활동이 국가의 정치적 안정성을 크게 위협하지 않는다고 보고 이를 눈감아 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정일의 진심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 논리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김정일의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상대적으로 호의적인 인상을 만들어냈다.?그는?여성 편력이 심했지만, 부인과 아이들에게 많은 신경을 썼다. 또 외국 고위 인사들은 김정일의 헤어스타일과 외모는 보잘 것 없어도 꽤?매력적인 사람이었다고 회고했다.

김정일은 김일성과 달리 관대한 점이 있었다. 중국을 통해 한국으로 귀순하려던 김정일의 전 경호원을 투옥후?1년 만에?풀어준 적이 있다. 결국 그 경호원은 한국으로 귀순했지만 말이다. 또 북한에서는 이민이 금지돼 있지만 가족들이 중국에 살고?있는 어떤 나이 든 기술자를 중국으로 보낸 일도 있었다.

김정일은 독재가 세습되는 집안에서 태어난 불행한 사람이었다. 만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김정일은 유명 영화감독이나 한 회사에서 마음 따뜻한 부장 정도가 됐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운명은 달랐다. 경제적 어려움과 불황, 경찰국가 등 아버지의 무거운 유산으로 뒤덮인 국가를 책임져야 했다.

김정일에게는 체제 생존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따라서 나라의 문제를 해결했다고는 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체제 안정에 반하는 정책은 취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현 체제의?좁은 한계 안에서 그는 주민들의 고통을 덜어주려 시도했던 지도자다.

*원문은 아시아엔(The AsiaN)?영문판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 http://www.theasian.asia/archives/5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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