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상무위원 ‘리커창’은 누구?… ‘조용한 학구파에서 개혁 총리로’
‘리커창(李克强)’. 시진핑 중국 공산당 총서기에 이은 2인자로 부상한 그는?13억의 중국, 향후 10년을 이끌어갈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7인 중 한 명이다.
중국 검색사이트 바이두(百度)에서 리커창(李克强)을 검색하면 연관 검색어로 ‘사회보장주택’, ‘의료보험’, ‘민생’ 등의 단어가 동시에 노출된다. 그만큼 민생 현안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강조해왔다는 의미이다.
지난 11월 15일 오전, 중국 공산당 제18기 중앙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 시진핑(?近平) 다음으로 입장해 공산당 서열 2인자임을 전세계에 각인시킨 리커창 국무원 부총리은 온화한 이미지와는 달리 개혁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을 해왔다.
리커창은 지난 11월 21일 베이징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열린 전국 11개 개혁 시범 성시 담당자 회의에서 “이날 회의를 두 글자로 요약하면 ‘개혁’, 네 글자로 줄이면 ‘개혁, 개혁’, 여섯 글자로 풀어서 말하면 ‘개혁, 개혁, 개혁’”이라고 말하고 “2020년 국민의 생활을 개선하고 전면적인 샤오캉(小康)? 사회를 건설하려면 개혁과 개방을 강화하는 길밖에 없다”며 강력한 개혁 의지를 밝혔다.
리커창이 이같이 중국 개혁의 조타수 역할을 맡게 된 것은 그가 경제에 박식하고 서민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리커창은 1955년 7월 안후이성(安徽省) 딩위안현(定??)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리펑산(李奉三)은 안후이성 펑양현(???) 현장을 지낸 바 있고 후에 안후이성 지방지판공실의 부주임으로 근무하다가 퇴직했다. 지방관리였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하게 보냈다.
당시 4년제 대학 진학률이 80%일 정도로 명문이었던 허페이시제8중학(合肥市第八中?)에 입학해 졸업하는 등 어린 시절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학교가 문을 닫고 대학 입학 자격이 취소되자, 아버지의 주선으로 유명 한학자 리청(李?)의 문하에 들어가 사기(史?), 자치통감(?治通?) 등 한학을 배웠다.
하지만 이마저도 문화대혁명으로 여의치 않자, 1974년 하방(下?) 활동에 지원해 안후이성 펑양현에서 육체노동을 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당시 그는 농민 2000명과 함께 4년간 생활하며 농촌생활을 몸으로 체험했다.
1977년 대학입시 제도가 부활하자, 리커창은 대입시험에 다시 응시했다. 그는 29:1의 경쟁률을 뚫고 펑양현 최고의 성적으로 1978년 베이징대학 법학부에 입학했다.
리커창은 대학 시절, 조용한 학구파였다는 게 대학 동기들의 중론이다. 동기들은 리커창을 “조용하고 집요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특히 걷거나, 식당, 버스정류장 등에서 차례를 기다릴 때도 영어를 외울 정도로 영어 공부에 열심이었다”고 평가했다. 공부 뿐 아니라 학생회 주석을 역임하는 등 학생회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1976년 5월 중국 공산당에 가입한 리커창은 대학졸업 후인 1982년 공청단(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해 중앙서기처 후보서기를 맡으며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공청단에서 16년간 일하면서 낙후된 빈곤 지역에 학교를 지어주고 빈곤 어린이를 돕는 것을 골자로 하는 ‘희망공정(希望工程)’ 프로젝트를 정착시키고 청소년발전기금회를 설립하는 등 민생경제에 관심을 기울였다.
공청단에서 일하는 과정에서도 학업은 손에 놓지 않았다. 졸업 후에도 베이징대학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는데 특히 1985년 그가 쓴 ‘중국 경제의 3원 구조를 논하다’라는 논문은 중국 사회과학원에서 주는 경제학계의 최고상인 ‘쑨예팡(?冶方)경제과학상’을 받기도 했다.
공청단에서의 공적을 높게 평가받은 그는 리커창은 1998년 44살에 허난성(河南省) 부서기 겸 대리성장으로 부임한다. 이는 최연소 성장이며 박사 학위 출신의 성장이 부임하기는 리커창이 처음이다.
리커창은 첫 부임지에서 중부권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른바 ‘중원굴기(中原?起)’를 제창했다. 리커창은 동부 연안의 인재, 자금, 기술, 브랜드 등을 허난성에 적극 유치하고 ‘하방’ 시절의 경험을 살려 허난성의 농업을 현대화시키는데 중점을 뒀다.
리커창의 노력으로 성과를 거둬 1998년 1인당 GDP가 4976위안(86만5000원) 수준이었던 허난성 경제를 2003년 1인당 GDP 7590위안(132만원)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중원굴기’는 중앙정부에서 채택해 적극 추진할 정도로 호평을 받았다.
이어 2004년 랴오닝성(??省) 서기로 부임해 국가에서 추진하는 ‘동북 진흥 계획’에 맞춰 3년 동안 빈민촌 개조 사업을 펼치고 동북지역의 해외 투자를 적극 유치해 공업 인프라를 개선했다. WSJ는 “리커창은 재임기간 동안 랴오닝성 주민 100만명의 주거환경을 개선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능력을 인정받은 리커창은 2007년 시진핑과 함께 중앙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입하며 차세대 지도자의 한 명으로 부상했으며 이후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며 차기 총리직을 예약했다.
리커창은 이제 중국의 새로운 개혁을 준비하고 있다. WSJ는 지난 11월 19일 ‘리커창의 모든 것’이라는 기사를 통해 “원자바오(?家?) 총리가 총리직을 맡기 전까지 어떤 집정 경험도 없었다면 리커창은 중국의 인구밀집 지역인 허난성과 산업화 도시인 랴오닝성의 성장을 맡은 경험이 있다”며 “리커창은 경제구주 불균형 해소에 있어 진정성을 보이고 있다”고 평했다.
또한 리커창의 대학 동기의 말을 빌어 “리커창이 체제를 바꿔놓는냐 아니면 체제가 그를 바꿔놓느냐가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온바오/박장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