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석의 시선] 독립투사 이정규(李丁奎), 왜 독립유공자 안됐나?
11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에선 우관又觀 이정규李丁奎(1897~1984년)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학술대회가 열렸다. 굳이 ‘재조명’이라는 용어를 쓴 이유는 그에 대한 연구나 평가가 몇 차례 있었지만, 단 한 번 흡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우선 우관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이를 위하여 간단히 소개한다. 그는 30~40대 일제강점 어간, 형 을규乙奎와 함께 중국 상하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펼쳤던 아나키스트였다. 광복 후 귀국해서는 교육 활동에 투신해 성균관대와 청주대의 번영‧창달에 힘썼으며, 제7대 성균관대 총장(1963~66년)으로 봉직할 정도로 교육에 정열을 바친 인물이었다.
그는 새로이 광복된 나라에선 교육과 농촌 계몽이 급선무라는 자각 아래, 이 두 가지에 자신의 아나키스트적 역량을 쏟아 부었다. 이를 위해 국민문화연구소(사단법인 등록 제1호)를 설립, 대학생 농촌활동 지원과 전국농촌운동인 협의회 결성 등으로 계몽적 활동역량을 키우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같은 아나키스트인 우당(友堂) 이회영(李會榮)을 도와 독립운동을 펼친 강골의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약산(若山) 김원봉(金元鳳)과 함께 격렬한 독립투쟁에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물론, 그의 활약 자체가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점이다. 형 을규는 독립유공자 인정을 받았다.
여기엔 몇 가지 사유가 있다. 우선 우관에겐 직계가족이 없다. 부인과 단둘이 직계 없이 평생을 살았다. 직계가족 구실을 할 수 있는 이는 조카 손녀인 이원영(76) 부부뿐이다. 이들은 우관이 별세하기까지 근 30년을 함께 생활했다, 거의 친 자식의 입장에서 우관을 봉양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우관이 생전에 자신의 독립유공자 등재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졌으며, 유족은 유지를 받든다는 뜻으로 독립유공자 예우 신청을 미뤄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날 학술대회에서 두 가지 중요한 증좌가 나타났으며, 이를 토대로 단체에 의한 독립유공자 등재 신청의 길이 열리게 됐다. 하나는 그가 의열단원으로 치열한 독립 운동을 했음이 사료에 의해 밝혀진 것이다. 김명섭 단국대 교수가 이날 공개한 내용에 따르면 의열단장 김원봉에 대한 동정보고와 함께 을규‧정규 형제의 의열단원으로서의 활동 상황이 다른 요원들과 함께 뚜렷이 남아 있는 것이다. 형제가 복역했던 서대문형무소 측의 보고서에 그렇게 기록돼 있는 것이다.
이날 이종찬 광복회장도 “우당 할아버지에 비해 너무도 과소평가된 우관 선생의 활약상 및 생애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확실한 평가가 이뤄져 냉정한 관점에서 평전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하나는 독립유공자 등재 신청은 가족뿐 아니라 단체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김창덕 국민문화연구소 회장은 “조만간 우관 선생에 대한 독립유공자 등재 신청 작업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우관이 지구별을 떠난 지 어언 40년, 백구과극(白駒過隙)이라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 세월을 어찌 탓하랴’마는 적어도 나라와 민족에 대한 그의 사랑과 헌신은 기억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