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선비’ 육군총장의 피로 쓴 회고록 ‘군인 남재준이 걸어온 길’

남재준 육군참모총장의 <옥중에서 쓴 군인 남재준이 걸어온 길>

조선시대 대학자 중 한명인 다산 정약용은 18년의 유배를 살았다. 이 유배가 개인에게는 큰 불행이고 고통이었지만 ‘다산학’이라는 조선사상사의 저수지를 탄생케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정다산의 강진 유배와는 다르지만 동일한 정치적 보복을 당해 감옥에 유폐되었던 남재준 총장은 집안 가형과 누님에게 보내는 편지로 살아온 길을 정리하고 300여 권의 독서시간을 확보했다. 4년 7개월의 죄인 아닌 죄인으로 영어(囹圄) 생활 중 인품에 감화된 교도관이 헤어짐을 아쉬워하여 감옥에 좀더 계셨으면 좋겠다고 말한 부분에서 빵 하고 터졌다.

계급과 지위를 떠나 누구에게나 겸손하게 다가서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었다는 면을 알 수 있다. 축하를 해야 할 장소에서도 이별을 아쉬워 한 장면에서 어떤 인품을 지닌 분인 지를 알 수 있다. 현역 시절 육군참모총장으로서 정도를 걸어 왔지만 부하들에게는 외경(畏敬)의 상징이었던 분이 감옥에 있으면서 군인으로서 여정을 피로 찍어 형언할 수 없는 인고의 시간을 극복하는 회고록을 펼쳐 냈다. 이 회고록에는 수많은 에피소드와 일화가 담겨있다

남재준 육군참모총장


인간 남재준 총장의 진솔성

개인적으로 남재준 총장을 처음 만난 것은 육군기계화학교 교관시절 인접 보병학교 교수부장으로 부임했을 때였다. 당시는 고 윤용남 총장이 육군의 교리 관련 일대 혁신을 일으켰고 한반도 방어의 도로견부 종심방어 관련 교리 발전에 개혁 드라이브를 걸었을 때, 보병학교의 교리 개선 발전토론을 통해서였다.

통상 계급이 올라가면 소부대 전투기술 관련 사항은 가볍게 생각하지만, 보병학교 교리 개선 내용은 대단히 구체적이고 실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바로 6사단장으로 부임해 먼발치에서의 대면도 짧게 끝났다.

필자가 2003년 60기계화보병 여단장 시절 그는 육군총장이었는데 ‘장교의 도’를 통해 너무나 도덕성을 강조하여 원성이 자자했다.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결벽증을 나타냈다는 생각을 했다. 육군대학 전술학 처장 시절에 부서 교관들이 남 총장을 한번 모시고 가까이서 말씀을 듣고 싶다하여 기회를 마련했다. 총장 재임 시절 교관들의 자질 향상을 위해 판공비로 해외 견학을 독려해줄 정도로 교관 자질 향상에 관심이 많았다. 전역 후 현충사를 답사하는 길에 동참할 기회가 우연히 있었다.

자신의 저서를 들고 있는 남재준 육군참모총장


회고록의 의의와 가득한 일화

우리 시대 마지막 도학자이자 꼬장꼬장한 선비 남재준 총장의 인간적인 면모와 군인으로 걸어왔던 가시밭 길을 회고록을 통해 확연히 알 수 있다. 옳은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그래서 장교가 되어서도 별명이 ‘사관생도 남재준’, 또는 ‘야전교범’으로 불리었다. 입바른 소리를 하여 좌천되는 길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항상 현재 보직이 최종 보직임을 생각하고 군인으로 최선을 다해온 모습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책임을 지고 옷을 벗을 마음의 준비를 해 왔음을 알았다. 진급이 안 되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리어카를 구해 군고구마 장수라도 해서 가족을 부양하겠다는 각오를 밝히는 부분에서 마음이 숙연했다.

육사를 들어가기 위해 3수까지 했던 분이라는 점, 충무공의 난중일기를 왜 그토록 가까이 하며 숙독했던가 하는 부분에서 미육사출신 장교가 충무공의 전사를 더 잘 알고 있었는데 본인은 정작 충무공 전쟁사를 몰라 그때부터 평생 난중일기를 손에서 놓아 본 적이 없었다는 참군인 남재준 장군의 군 생활 행적과 수많은 일화를 읽을 수 있다,

평생 골프를 치지 않은 이유가 궁금했다. 사연인즉 생도시절 골프교육 시간에 공 대신 골프채의 헤드로 뒤땅을 쳐서 조교로부터 “생도님은 다시는 골프를 치지 마시라”라는 말을 지키느라 그것을 평생 마음 속에 간직하고 실천해 ‘No handy’를 달성한 부분에서 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실미도 사건 발생 시 경인국도로 북파공작원의 이동로를 판단해 냉정하게 판단조치한 일이며, 큰 딸을 잃어버렸을 때 아이의 걸음속도와 시간을 계산하여 예측도를 그린 일 등은 아무리 황당한 상황 속에서도 냉정과 침착성을 유지했던 군인다움에 기인함을 알았다.

많은 아쉬움과 안타까움도 있었다. 문제가 발생한 부대의 지휘관 교체가 아무리 급해도 가족에게 연락도 못하고 긴급 투입된 일은 아무리 전화가 안 되는 시대였다고 해도 기다리는 가족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고 통보도 하지 않고 바로 투입되어 연락을 할 수 없어 군대의 무지막지함을 겪어야 했다.

부대 업무에 몰두하느라 아팠던 아들을 살리기 위해 미군부대에서 어렵사리 구했던 특수분유를 1/3도 먹지 못하고 곁을 떠났던 아들이 생각나면 밤중에 아들 무덤이 있었던 원주를 무작정 찾아갔던 일, 갓난 아들이 먹다 남긴 분유를 전역할 때까지 20여년을 갖고 있다가 군복을 벗으면서 분유는 마음에 담고 분유통을 버렸다는 부분에서 마음이 아려왔다.

대만에서 유학왔던 사 소령의 한국어를 육대총장에게 통역한 에피소드를 보고 “남 소령 젊은 나이에 언제 유창한 중국어를 배웠나?” 하는 대목에서 얼마나 배꼽 잡고 웃었는지 모른다. 사단장 부관 시절 사단장 부인이 요청한 행정용 의전차량을 배차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평생 가족에게 군대 차를 내어 주지 않았다는 부분에서는 참 고지식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주사태 무력진압의 정당성을 교육하라는 임무를 거절하자 교관 직위 해임과 동시에 101보충대 대기명령을 받았던 일, 막다른 골목에서 ‘불모지대의 이끼 다다시의 일화’를 들고 부인을 설득하려 하였고 3일간 소주병을 들고 출근하는 것처럼 위장출근하였던 일을 고백하자, “내일은 또 내일의 일이 있을 것”이라는 사모님의 말씀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내일은 또다시 태양이 뜬다’(Tomorrow is another day)라는 대사가 오버랩되었다. 그 후 평생 동안의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부분에서 부창부수를 생각했다.

군에서 진지에 있었던 폐타이어가 일거에 없어지게 된 정책건의를 수방사령관 시절했으며, 폭우에 유실된 장애물을 복구하는 작업 중 물에 빠졌을 때 대대장을 구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던 부하들, 항상 상황을 명철하여 군사령관 지휘서신에 대한 조치를 보고하여 통찰했던 일화와 사연, 참모장 시절 육본에 들어갔던 사단장으로부터 ‘OAC’라는 단어만 듣고도 충정계획 투입계획의 추정과업을 추정하여 즉각 54매의 브리핑 준비로 대비 보고한 사연은 통찰력의 진수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준 에피소드다.

대령급 장교 시절 사무실 배정을 해주지 않아 사령부 지하 교보재 창고에서 교범과 전쟁사 자료, 군사이론 서적과 군관련 연구보고서와 해당부대의 훈련결과 보고서를 탐독하여 군사령부 전사교관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한 비정한 일화는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

그리고 오늘날 전투지휘훈련 (BCTP) 모델과 유사한 통일대 모델을 처음 직접 개발한 점, 그 통일대 모델이 폐기되었던 아쉬움을 토로하고 있었는 바 전쟁사를 통한 과학적 계량적 판정모델을 개발한 점을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알게되었다. 수방사 창설 이래 합참 전평시 작전태세 및 작전능력 평가를 처음 받게하였고 육본 지휘검열을 통해 부대를 정상화시킨 배경을 이해했다.

국감을 받고 있는 남재준 육군참모총장


회고록 집필은 ‘위장된 축복’

총장 시절의 주요 에피소드와 일화는 제2장에 오롯이 정리되어 있다. 무엇을 하든 어떤 상황에서든 투철한 애국심과 솔선수범 그리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나중에 합참 타 부서의 업무까지 해결하자 타부서 업무 청부업자냐는 말을 들었다는 부분에서는 한참을 웃었다. 국정원장을 1년 남짓 했지만 직원들은 가장 국정원장다운 국정원장으로서 자부심을 느끼고 근무하고 애국심을 강조한 분으로 기억한다.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국정원장 임명장을 받고 있는 남재준 총장

문재인 정부는 관행으로 내려왔던 국정원 특수활동비를 청와대에 상납 및 사법방해(원세훈 원장시절의 댓글관련) 죄목으로 엮어 남재준 총장에게 4년 7개월 동안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겼다. 하지만 남 총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회고록을 남길 수 있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아마 남 총장은 자신의 처지에 대해 원망보다 감사할 것 같다. 감옥 안이나 집에서나 사람을 자유롭게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 하는 일은 동일하였을 것으로 본다.

나는 남재준 총장을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선비라 부르고 싶다. 회고록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진정한 무인이자 선비였으며 군인이었음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다.

윈스턴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시점에 수상에서 물러났다. 그후 처칠은 부인 케럴라인에게 자기의 수상직 해임은 ‘위장된 축복(Disguised celebration)’이었다고 했다. 영국 국민들은 노수상이 전쟁 동안 너무 지쳐있어 그를 쉬게 하려고 했는데 당사자인 처칠은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고 생각했을 법하였다.

그러나 그가 <제2차 세계대전사>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대영제국 수상을 지낸 것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로서 더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했다는데, 남 총장의 회고록은 육군 최고의 지위에 도달하기까지 수도자와 같은 형극의 길을 걸으며 군인으로 살아온 진실한 기록을 정리했다는 점에서 후세에 큰 이정표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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