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화제] 최인호-이장희 두 천재의 콜라보, 말하듯 “그건 너”
최초 구어체 대중가요, 최인호가 이장희에게 메모로
“형, 가사 하나 써줘요” 부탁 듣고 단 10분만에 긁적거려
‘모두들 잠들은 고요한 이 밤에
어이해 나 홀로 잠 못 이루나
넘기는 책 속에 수많은 글들이
어이해 한 자도 뵈이질 않나
(후렴)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어제는 비가 오는 종로 거리를
우산도 안 받고 혼자 걸었네
우연히 마주친 동창생 녀석이
너 미쳤니 하면서 껄껄 웃더군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전화를 걸려고 동전 바꿨네
종일토록 번호 판과 씨름했었네
그러다가 당신이 받으면 끊었네
웬일인지 바보처럼 울고 말았네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때문이야…’
이장희는 고 최인호보다 두 살 어리다. 1947년 경기도 오산에서 났다. 최인호처럼 그 역시 천재다. 최인호는 연세대 영문과를 나온 인문학도. 이장희는 같은 대학교 생물과를 다닌 이과생이었다. 1971년, 노래 ‘겨울이야기’가 그의 데뷔곡이다.
그는 2년 전 대중문화예술에 기여한 공로로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12년 전쯤, 울릉도로 옮겨살이를 한 덕분에 ‘자랑스러운 경북도민상’도 받았다. 이장희는 20대 중반에 미국으로 훌쩍 떠났다. 대마초 파동으로 연예인들이 후리가리(무더기 단속)돼 고초를 겪은 직후. 여러 음모론도 나돌았다.
장발을 기르고 유신독재에 노골적으로 반대하기 시작한 학원가를 누르려 작심한 것이란 얘기 등. 2003년 말까지, 미국 LA에서 라디오코리아 대표를 했다. 머리 좋고 사업 수완도 좋았는지 방송 사업가로 성공했다.
그는 최인호가 졸업한 서울고를 졸업했다. 연세대 생물과는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1971년 DJ 고 이종환의 권유로 가수가 됐다. 최인호가 ‘별들의 고향’으로 이름나기 전부터다. 신촌에서 괴짜로 호가 난 천재과 둘은 친했다.
‘별들의 고향’을 만든 최인호의 서울고 동기 이장호까지 합세해 더욱 연이 깊어졌다. 이제는 전설이 된 ‘세시봉’ 시절의 얘기다. 그 누구도 이장희를 가수로 대성하리라고 안 봤다. 명동의 세시봉은 음악감상실 레전드였다. 50여 년 전 ‘포크 시대’, 젊음으로 뜨거운 무대였다. 요즘 오디션이야 온갖 데서 다하는 것이지만 말이다.
당시 세시봉은 연고 아닌 실력으로 겨루는 곳이었다. 레전드 송창식과 윤형주, 양희은, 이장희, 김세환 등이 기세를 올렸던 무대가 거기였다. 물론 악동 이장희는 그 중에도 드문 예외였다. 경기도 오산이 연고라 대학 시절 동가숙서가식 했다.
이장희는 부잣집 도련님인 의사 집안의 윤형주 집 같은 데 빈대를 자주 붙었던 모양이다. 고 최인호는 생전 천재과여선지 이장희를 아꼈다. 둘은 전공한 장르는 서로 달라도 비슷하다. 70년대 초 포크송 ‘그건 너’가 나온 까닭이다.
찰슨 부르튼손처럼 이장희는 콧수염을 길렀다. 당시 포크, 통기타는 저항정신이자 젊은 문화의 상징이었다. 세시봉은 대중가요 전성기를 이끈 온상이었다. 세시봉에서 오디션 사회는 이상벽이 봤다. 그는 경향신문의 대중문화 담당기자였다.
세시봉 사장이나 이상벽 눈에도 이장희는 엉뚱했다. “자네가 여기서 왜 나와!” 취급만 받았을 뿐이었다. 당시 잘나간 송창식 윤형주 양희은 김세환과 달랐다.
대마초 파동 직후, LA로 도피성 출국한 그는 방송 사업가로 변신, 굴기를 했다. 그 직전 잘 나가던 최인호를 우연히 만났다. “형, 노래 가사 하나만…” 그렇게 받은 게 ‘그건 너’라는 가요 탄생 신화다.
당시 가요는 시와 비슷한 문어체밖에 없었다. 문어체를 가미한 노래들이 나오기 시작했을까? ‘그건 너’는 압도적 구어체 노래의 전기를 썼다. 완벽하게 말하듯 써내려간 노래 가사다. 당대의 레전드 최인호, 그에게 가사를 써달라고 한 괴짜 이장희가 콜라보를 했으니…
서울고 고딩 동문 최인호 이장호는 영화로 날렸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는 히트곡도 그리 나왔다. 이장희는 최인호의 원작을 이장호가 영화한 ‘별들의 고향’ OST를 맡아 유명세를 탄다. 대표곡은 ‘겨울 이야기’ ‘그건 너’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자정이 훨씬 넘었네’ ‘슬픔이여 안녕’ 등등.
1976년, 이장희는 결국 대마초 파동 때 구속된다. 음악을 끊고 1978년 생계 때문에 옷가게도 했다. 1982년, 미국으로 훌훌 떠난 뒤 음반도 냈다.
6년 뒤, 민주화의 틈을 타 잠시 귀국했다. 그때 콘서트를 열고, 음반을 발표했다. ‘라디오코리아’는 이듬해 설립, 사장을 맡았다. 대박을 쳤다. 근 15년간, LA 교민들 향수 달래고 돈도 번다. 툭하면 데스밸리로 갔다. 독특한 여행 방식으로 지금은 대중화한 ‘한달살이의 원조’가 바로 이장희였을 거다. 차를 몰고, 아름다운 캘리포니아 1번 도로를 질주했다.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라는 영화에 칠흙같은 어둠에 싸인 1번도로를 시골 라디오방송 DJ로 분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달린다. 이장희는 알래스카까지 한달 간 여행을 가곤 했다. 비행기를 타는 법이 없었다. 차를 몰고 가 차박을 즐겼다. 지금 그는 귀국해 울릉도에서 귀농생활을 한다. 지구촌 곳곳을 헤매며 한달살이를 해본 결과, 울릉도만한 곳을 못 봐서였다고 한다.
13년 전, 강호동 진행의 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세상에 존재를 알린다. 까칠한 이장희의 난생 처음 토크쇼 출연이다. 배우 문희와 윤여정이 창신초등학교 동창들이란다. 아무튼 괴짜들의 행진으로 ‘그건 너’가 태어났다.
‘불후의 명곡’ 반열, 대중가요사에 오른 곡이다. 방송에 두어번 나와서 얘기하는 걸 봤다. 만나 담소하면 통할 것 같은 느낌만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