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병'(病) 김현승(1913~1975)

하얀나비

믿음이 많은 사람들은 가벼운 날개를 달고
하늘 나라로 사라져가는데,

저녁 나절의 구름들은
저 지평선의 가느다란 허리를
꿈 많은 손으로 안아 주는데,

나는 문을 닫고
시들시들 나의 병을 앓는다.

나의 창가에서 까맣게 번지는
부드러운 꽃잎의 가장자리여,
네 서느럽고 맑은 이슬과 같은 손도
나를 짚는 이마 위에선 힘을 잃는다!

나의 병이 네 부드러운 살갗에 한번 스며들면
네 가느다란 손가락 마디의 보석들도
그 아름다운 눈빛을 잃을 수밖에,

바람에 실려 네 품안으로 가던
꿈의 쭉지도 청동과 같이 녹슬어
무거운 공중에 걸리고 만다.

꽃들의 주둥이가
젖줄을 빠는 기름진 흙의 나라에서
순금의 무게가 백년가약으로
가슴 깊이 그 머리를 파묻는 흙의 향기에서
내 목숨의 가시덤불은 시들시들 마른다!

어둠을 기다려
박쥐빛 날개로 내 사랑의 메마른 둘레를
한 바퀴 돌고서는,
다시 돌아와 내 안의 문을 닫고
시름시름 나의 병을 나 혼자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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