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비애에 빠져 있다”…이인호 교수의 ‘통찰’과 ‘자성’

이인호 교수는 조선일보 김윤덕 기자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얼마나 게으르게 살았는가, 완전히 어항에서 살았구나, 하는…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녔을 만큼 빚이 많은 내가 후대들은 그렇게 교육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큽니다. 그래서 미안하고 아픕니다.”


“‘해방 78주년, 건국 75주년 기념 광복절’이라 병기했어야”
“86그룹 정치인 등 운동권세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

여전히 명석했다. ‘광복 78주년’이라는 올해 경축식 제목부터 틀렸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말부터 그랬다. “제대로 쓰려면 ‘해방 78주년, 건국 75주년 기념 광복절’이라고 해야지요. 해방이 광복은 아니었잖습니까.” 촌철의 지적을 윤석열 대통령과 박민식·이상민 장관은 새겨 듣기 바란다.

조선일보 8월 21일자 이인호 교수 인터뷰를 줄이고 일부 손봐 소개한다.

김윤덕 선임기자는 리드를 “재점화된 ‘건국논쟁’에 역사학자 이인호는 단호했다”고 썼다. “1919년 건국설은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국가의 정체성을 훼손하기 위해 내놓은 주장입니다.”

우남 이승만은 ‘정읍발언’으로 단정 구상의 자락을 펼쳤다. 이듬해 1948년 5·10선거로 국회를 구성하고 헌법을 제정해 대통령 선출까지 마쳤다. 그 후 건국의 마지막 단계로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 세계에 선포한 바 있다.

노학자의 진단은 명쾌하다. “이 명백한 사실을 왜 부정하려 합니까?” 8·15 광복절 윤석열 대통령 경축사도 아쉽다고 꼬집었다. “해방 후 공산주의와 치열하게 싸우면서 마침내 자유민주주의 공화국을 출범시킨 건국 75주년의 의미를 강조했어야 하는데, 그걸 언급하지 않아 이 소모적인 논쟁을 잠재울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고 말이다.

87세 원로 사학자는 “대한민국 75번째 생일 축하가 이렇게 힘든 것이냐”고 통탄했다. 인터뷰를 하며 “비애를 느낀다”고 장탄식까지 한 모양이다.

건국 원년은 1948년이라고 선생은 못박았다. ‘대한민국 연호’ 기산을 1919년으로 하자는 이종찬 광복회장의 주장을 ‘역사 왜곡’이라고 꾸짖었다.

“반(反)대한민국 세력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으니까요.” “해방과 광복이 다른가요?”라고 김윤덕이 물었다. 노 교수는 답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일제 치하에서 놓여난 겁니다. 그 감격이야 말할 것도 없지요. 하지만 우리 힘으로 해방을 얻은 게 아니고, 나라도 미국과 소련으로 분단 점령된 상황이라 독립국가가 되지는 못했어요.”

1948년 정부수립과 자유민주공화국으로 독립을 선포해 ‘빛을 다시 찾았다’는 거다. 진정한 광복은 그때 이뤄졌다는 말이다.

-윤 대통령 경축사는 왜 아쉬웠습니까.
“독립운동은 건국운동이었고 대한민국이 얼마나 많은 성취를 이뤘는가에 대해선 말씀하셨는데, ‘그게 다 1948년 나라가 건국됐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언급이 없었어요.”

김윤덕은 꼬치꼬치 물었다.
-건국 논쟁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던 걸까요?
“건국이 어떻게 논쟁이 됩니까? 대한민국 사람이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이 탄생한 걸 기뻐해야 당연하지요. 세계 어디라도 물어보세요. 대한민국 탄생이 언제인지.”

질문을 잘 해야 하는 시대를 맞았다. 그래야 챗GPT도 좋은 답을 내놓는다.

-1919년이 대한민국 원년이면 어떤 문제가?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의단체였고, 국가적 기능을 하진 못했어요. 국민을 보호할 능력이 없었고, 국민들도 임정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김윤덕도 끈질기게 캐묻는다.
-임정과 독립운동을 ‘폄하’하는 걸로…
“그분들이 추구했던 게 독립이고 독립을 이룬 게 1948년인데, 그게 왜 독립운동가를 ‘폄훼’하는 겁니까.”

노학자는 ‘훼손하다’의 훼를 사용했다. 김윤덕도 그리 쉽게 물러서진 않는다.
-미국도 독립선언 한 1776년 7월 4일을 독립기념일로…
“미국은 영국 식민지였지만 처음 형성될 때부터 각 주별로 자치정부가 있었어요. 독립을 선포한 건 영국에서 부과하는 세금이 과다해 그걸 못 내겠다고 한 데서 출발한 거지, 나라는 이미 스스로 운영하고 있었던 겁니다. 따라서 독립 선포가 곧 독립이 될 수 있지만, 우리는 달라요.”

하버드대에서 서양사를 전공한 학자답다.
“일본 법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서 우리가 독립을 선언했다고 해서 그게 독립이 됩니까?”

-이승만 대통령도 대한민국 원년이 1919년이라고 했다던데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독립선포 식사에 ‘대한민국 30년’이란 대목이 나오긴 합니다.”

“하지만 앞부분엔 이렇게 썼어요. ‘8월 15일 오늘에 거행하는 식은 우리의 해방을 기념하는 동시에 우리 민국이 새로 탄생하는 것을 겸하여 경축한 것입니다.’ 국가의 새로운 탄생이 1948년 8월 15일에 드디어 이뤄졌다는 뜻입니다.”

김윤덕은 ‘1948년 건국론’을 비판하면 모두 좌파냐고 끈질기게 묻는다.
“1948년이 ‘건국의 해’라고 말하길 주저하는 사람들 중에는 좌파가 아닌 사람도 물론 있었어요. 영구 분단에 대한 우려 때문이죠.”

이 교수는 “김구 선생도 그중 한 분”이라고 선생은 말했다.
우남 이승만은 공산화 위협을 막으려면 남한만이라도 먼저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한 것이란다. 북은 1946년 2월부터 공산체제를 만들기 시작했다. 국제정치와 국제법에 통달한 이승만이 서둘러 주권국가로 인정을 받아야 한다고 내다봤다. 선견이자 원려심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저쪽에 넘어갈 수 있다며 ‘정읍연설’을 합니다. 좌파들은 이를 분단 획책이라 비판하지만 남한까지도 공산화되는 걸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보는 게 맞아요.”

우리 헌법에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 전체라고 명기돼 있다. 우리 헌법의 권능이 북에까지 미치진 못 한 상태이긴 하다. “하지만 (북한은) 언젠가 회복해야 할 영토로 남아 있는 겁니다.”

이인호 교수는 KBS 이사장 시절의 문제적 발언도 들춰냈다. ‘김구 선생은 대한민국에 공로가 없다’고 했다. “난 사실을 말한 겁니다. 김구는 이승만처럼 국제 정세에 밝지 못해 한반도가 분단으로 가고 있는 걸 인지하지 못했어요.”

처음엔 백범도 정읍연설에 동조했단다. ‘설산 장덕수 암살’을 계기로 사이가 갈라졌다. 그러면서 단정 노선을 비난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범은 독립운동가로선 큰 족적을 남겼다. 그러나 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UN에도 지지하지 말라고 한 것도 역시 팩트다. 김규식과 함께 이북으로 넘어가 이용당한 거다. 그 때문에 이인호는 “(김구가) 건국에 공로가 없다”고 한 것이란다.

함께 넘어간 70여 명이 북한에 눌러앉아 한 자리를 했다. 홍명희 백남운 이극로 김원봉 허성택 등이 요직에 기용됐다. 백범과 김규식이 남으로 귀환한지 닷새 뒤에 5.10총선거가 치러졌다. 건국의 도정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백범은 단독정부 노선에 끝까지 반대했다. 우남과 백범은 모두 공산주의에 반대했다.

김윤덕은 그런데 “두 분은 왜 좌우의 대립 구도에 서게 됐느냐?”고 물었다. “좌익이 김구를 이승만 죽이기의 도구로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암살당한 김구를 성역화해서 대한민국 하면 김구 선생이 떠오르도록 기획한 거죠. 그 일환으로 이승만을 악마화한 ‘백년전쟁’이 만들어졌고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독재 하면 박정희, 전두환을 떠올렸어요. 그런데 1990년대 소련이 무너지고부터 독재자 하면 이승만을 떠올립니다.”

노학자는 “이상하잖아요?”라고 반문했다. “이승만은 합법적으로 대통령이 된 사람입니다. 4·19의거도 헌법이 국민의 항의권을 보장하는 민주적 토대를 만들어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 이승만이 독재의 상징으로 돌변한 건, 운동권에 종북세력이 침투해서라고 했다.

“김구를 이용해 이승만 죽이기 작업을 하고, 1948년을 부정하고, 대한민국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나라가 되고요. 이 대통령의 운구가 하와이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장례식 치를 때 어마어마한 인파가 도심을 메우고 애도했습니다. 4·19 주역들이 왜 이승만 대통령 묘역을 찾아갔겠습니까?”

우남은 자유당 정권 말기에 80 넘은 노인이었다. 눈도 어둡고 귀도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국정을 이기붕에게 맡겼다. 4.19 난 것도 잘 몰랐을 정도였으니…

건국 대통령의 공과를 잘 따져봐야 할 거다. 1965년 7월 27일, 우남 영결식이 열렸다. 영결식장인 정동제일교회에서 운구는 출발했다. 남대문과 제1한강교를 지나 동작동 국립묘지까지 연도에 100만 시민은 애도했다.

-대한민국에서 제대로 된 혁명은 ‘1948년 건국혁명’이라고…
“북한과 우리를 보세요. 똑같이 능력 있고 부지런하고 자식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는 민족 아닙니까? 그런데 지금 어떻게 달라져 있습니까…1948년 제헌 헌법이 계급 간 차별금지, 남녀평등을 선포해 모두가 평등하게 투표하고 교육받게 된 것이지요. 그래서 건국은 혁명입니다.”

-이승만대통령기념관 건립추진위에 합류하셨지요?
“이승만기념관은 한 사람의 공과를 평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에요. 독립 투쟁과 건국, 그리고 13년 동안 대통령을 한 사람의 족적을 알아야 우리가 무엇을 위해 싸웠고 어떤 난관에 부딪혔으며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게 됩니다.”

역사학자답게 정곡을 찔렀다.
“이 대통령은 기록을 꼼꼼히 남긴 분이에요. 기념관이 생겨 모든 자료가 다 공개되면 이승만뿐 아니라 동시대 활동했던 김구, 안창호 같은 분들에 대해서도 소상히 밝혀지겠죠.”

“기념관 건립을 반대하는 건 그간의 거짓말이 들통날까봐 두려워하는 이들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는 “광장의 국민들은 건국 75년을 축하하는데, 이 나라 지도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통탄했다.

그는 정치인을 비롯한 86그룹은 공부를 안 해서 종북세력에게 이용당했다고 개탄한 바 있다. “독재 타도하자고 싸운 기간이 1972년부터 1987년까지 15년인데, 이때 제대로 된 역사서를 읽고 고민하고 토론했다면 시비를 가릴 능력이 생겼을 겁니다.”

그의 통찰은 놀랍다. 특히 이 대목이 압권이다. “그래서 나는 386 운동권 세대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들’이라고 봅니다. 80년대 초 내가 일간지에 기고한 글이 있어요. 시위하는 학생들을 전부 폭도로 몰면 이 나라엔 희망이 없다고. 그런데 그들이 기득권이 되면서 민주화정신과는 전혀 다른 길로 가게 된 겁니다.”

지식인으로서 이인호 선생의 훌륭한 대목은 자성을 할 줄 알아서다. 김윤덕이 “문재인 정부 때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 나는 죽어 마땅하다’고 하셨지요?”라고 물었다.

“나를 포함한 기성세대 학자들의 비겁함이죠. 역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면서 현대사를 가르치지 않았어요. 이 공백을 우리 역사에 부정적 시각을 가진 이들, 선전선동의 귀재인 좌파들 손에 다 내주게 된 겁니다.”

역사를 공부하는 건 조작과 선동에 휘둘리지 않는 지성을 키우기 위해서라고도 했다. “지도자의 판단은 49대51의 상황에서 51을 택하는 거지, 흑백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에요. 그런 통찰과 지혜는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하는데 파렴치한 자들이 역사를 조작하고 정치도구화해 나라를 흔들고 있어요.”

이인호 선생은 요즘 “비애에 빠져 있다”고 고백했다.

“내가 얼마나 게으르게 살았는가, 완전히 어항에서 살았구나, 하는…가난한 나라에 태어나 세계에서 제일 좋다는 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녔을 만큼 빚이 많은 내가 후대들은 그렇게 교육하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큽니다. 그래서 미안하고 아픕니다.”

김윤덕 선임기자는 글도 잘 쓰지만, 사람도 잘 포착한다. 이번엔 한번 다뤄야지 했던 주제를 설득력 있게 풀어낼 노학자를…

이인호 교수는?

1936년 서울 생. 초등 3년 때 해방을 맞았다. 서울대 사학과에 다니다, 힐러리 전 미 국무장관이 나온 명문 웰슬리대로 간다. 한국 여성으로는 하버드대에서 첫 박사학위(러시아사)를 받았다.

고려대, 서울대 교수를 거쳐 YS DJ 정부 때 핀란드, 러시아 대사를 역임한 최초의 여성이다. 박근혜 정부 때는 KBS 이사장도 지냈다. 작년 가을, 송상현 선생과 애제자 김현 전 변협회장과 함께 오찬을 한 일이 있다. 87세 고령인데도, 명석한 기억과 논리로 과거사를 명쾌하게 풀어내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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