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렬의 시선] 꽁보리밥의 추억

꽁보리밥

나는 요즘 쌀을 한톨도 넣지 않은 꽁보리밥을 자주 먹고 있다. 하얀 쌀밥 보다 풍미가 있다. 식은 꽁보리밥 한 덩어리를 그릇에 담은 뒤 고추장에 열무김치를 넣고, 참기름 한 방울 떨어트리면 어릴적 배고팠을 때 먹던 잊을 수 없는 맛이 입안에 감돈다. 그리고 천천히 음미하며 먹는다.

나의 유년시절이었던 1960년대 보리밥은 가난의 상징이었다. 당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보릿고개를 넘기가 힘들었다. 이 시기를 지나야 보리밥이라도 먹었다. 지난해 가을 수확한 식량이 모두 떨어지고 하곡인 보리가 여물지 않은 음력 4∼5월의 춘궁기를 보리고개라했다. 보리를 한자로 맥(麥)이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한문으로 보리고개를 맥령기(麥嶺期)라고도 한다. 배고픈 시기를 보내는 것이 고개를 힘겹게 넘어가는 것과 같다고 하여 이를 빗대어 보리고개라 부른 것이다.

그나마 보리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좀 형편이 나은 축에 속했다. 굶기를 밥먹듯 하던 사람들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녹화사업에 따라 나무심기에 동원돼 사방공사를 하고 얻은 밀가루로 멀건 수제비를 만들어 배를 채웠다. 그래도 나의 선친께서는 초등학교 교장으로 월급을 받으셨기 때문에 다행히 굶지는 않았지만 쌀이 듬성듬성 섞인 보리밥, 강냉이 밥을 먹었다. 그러나 다른 초등 친구들은 깡보리밥 도시락을 싸 오거나, 학교에서 주는 강냉이 죽을 멌었다.

나의 꽁보리밥 추억은 이렇다. 초등학교 5학년 초여름 어느날 밖에서 뛰어 놀고 출출한 오후 집에 오니 어머니께서 출타 중이었고 집안은 적막했다. 집 안에 먹을 것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배고프니 무엇이 없을까 부엌에 들어가보니 어머니께서 삶은 겉보리쌀을 설겅(찬장) 모서리에 걸린 소쿠리에 담아 놓은 것이 보였다. 당시에는 겉보리를 삶아 소쿠리에 담아 놓고, 이를 꺼내 밥을 짓을 때 쌀이나 강냉이와 함께 넣었다. 그냥 겉보리를 삶지 않은 채 밥을 지으면 식감이 거칠고 미끌미끌했기 때문이다.

보리도 쌀보리와 겉보리가 있다. 보리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보리는 크게 겉보리(피맥)와 쌀보리(나맥)로 나뉜다. 겉보리는 씨방 벽에서 끈끈한 물질이 분비돼 껍질이 알맹이에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반면 쌀보리는 껍질이 쉽게 분리된다. 그래서 겉보리는 거칠고 씨알이 굵어서 입에서 뱅뱅돌고 잘 씹히지 않는다. 그래서 삶아서 다시 밥을 짓는다.

나는 허겁지겁 보리밥을 그릇에 담고 장독대에 가서 퍼온 고추장에 비볐다. 지금처럼 열무김치나 기름을 넣을 형편이 안 되니 그냥 고추장만 넣어서 비볐다. 그런데도 그 맛이 얼마나 환상적이었는지 지금도 그 맛을 잊을 수 없다. 그때를 회상하면 지금도 그 맛과 향이 혀끝에 감돈다. 생각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인다.​

보리고개 시절 아이들은 보리밥 먹기를 싫어했다. 필자의 대전 고등학교 은사인 김영덕 교감 선생님의 수필집, ‘나무도 보고 숲도 보고’에는 6.25 때 죽은 딸의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딸이 죽으면서 ‘아부지, 나는 보리밥 먹어서 죽어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 딸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이 오죽했을까? 딸에게 하얀 쌀밥을 먹이지 못하고 보리밥 먹어 죽는 딸을 봐야했던 아비의 심정이 가슴에 와 닿는다.

대학시절 나는 서울 부잣집에 입주 아르바이트를 했다. 식모를 둔 부잣집이었지만 밥을 지을 때 보리쌀을 넣어 지었다. 그런데 내가 가르치던 그 집 아들 녀석은 보리밥을 극도로 싫어했다. 아이는 용케도 밥을 입에 넣고 나서 보리만 혀로 똑똑 골라 밥상위로 뱉어 냈다. 그 모습을 볼 때마다 주먹으로 쥐어박고 싶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참았다. ​

이제 꽁보리밥만 파는 식당도 있다. 비만이 부자의 모습의 비춰지던 시절, 가난한 이들이 먹던 보리밥이 이제 건강한 밥상의 식단이 됐다. 나는 오늘 점심도 보리밥을 고추장으로 비벼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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