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관계의 실상이 드러나다?
욥기 19장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더 이상 나누어 지기 힘든 짐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의 병색이 짙어지고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자 욥의 친구들은 저마다 한마디씩을 하는데, 그 말들을 들어보면 욥의 아픔을 공감하기보다는 진단과 처방을 내리는 판단의 욕구가 굉장히 짙게 배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친구들의 이런 말은 욥에게 위로도, 답도 되지 않았습니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돌이켜 나의 원수가 되었구나”(욥 19:19) 친구들의 말에서 욥이 느낀 것은 위로가 아니었습니다.
큰 환난을 만나면 지금까지 맺어왔던 관계의 밑바닥이 드러나곤 합니다. 위기 속에서 우정의 진위가 가려지기도 하고, 어떤 가족은 남보다 못한 사이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남보다 못한 가족이 있는가 하면 가족보다 나은 남도 있습니다.
신약성경에는 오랜 시간 병을 앓고 있던 한 사람과 그의 친구들에 대한 얘기가 등장합니다. 뇌졸증으로 쓰러져서 누워 지내던 환자 한 명을 그의 친구들이 침상째 매어들고 예수님께 나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마태복음 9:2)
보통 아픈 사람은 가족이 챙기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뇌졸증으로 쓰러진 그의 곁에 있었던 사람들은 가족이 아니었습니다. 아마도 가족들은 그의 긴 병을 견디지 못하고 다 떠났던 것 같습니다.
친구들의 손에 이끌려 온 그 사람을 예수님은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십니다. 욥의 친구들은 아픈 욥을 궁지로 몰아세웠지만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아픈 친구를 주님께 데려갔습니다. 나는 내 곁에 있는 이를 어디로 몰아가고 있는지,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생각해봅니다.
욥은 자신의 친구들을 향해 ‘재난을 주는 위로자’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욥 16:2) 어줍잖은 나의 위로가 재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그가 주님을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