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여정’···80대 노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요즘은 식사 때마다 아내에게 잔소리와 더불어 언성을 높이는 것이, 일상이 되고 있다. 한 수저라도 더 먹이려는 애절한 남편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내는 한사코 더 먹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영원할 것 같은 착각 속에 어이없게도 60여년이 찰나인 것을 모르고, 꽃길 같은 아름다운 행복 속에 우리 부부는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그 환상을 깨뜨려야 할 시간이 닥쳐오는 것일까?
오래 전 아내가 머리 수술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 겪은 일이다. 호기심이 발동해 병원 남자 6인실을 들여다보았다. 환자를 간호하는 보호자는 대부분이 환자의 아내였다. 옆방의 여자 병실을 일부러 누구를 찾는 것처럼 하며 눈 여겨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환자를 간호하는 보호자 대부분이 할머니를 간호하는 할아버지가 아니면 아내를 간호하는 남편이었다. 늙고 병들면 자식도 다 무용지물인 듯 곁에 있어 줄 존재는 오로지 아내와 남편뿐이라는 사실을 깊이 느꼈다.
부부 인연을 맺고도 간혹 성격 차이라는 이유로, 아니면 생활고나 과거를 들먹이며, 부부관계를 가볍게 청산하는 부부도 있다. 하지만 서두르면 안 된다. 언젠가는 갈라져야 하는 운명이며, 다만 진리께서 때를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젊음은 찰나일 뿐, 결국 늙어 병든 육신만 남아 고독한 인생여정(旅情)이 이어진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것일까? 왕후 장상도, 독재자도, 재벌 회장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권력 뒤안길에서 그들이 지금 누구에게 위로받고 있을까? 인생의 마지막에는 아내와 남편뿐일 것이다.
부부의 정이란 오늘 저녁에라도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여보 사랑해! 고생했어!” 어깨라도 주물러 주며, 더 늦기 전에 사랑의 속삭임을 한번 해보는 것 아닐까? 혹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한 잔의 술 힘을 빌려서도 해야 할 말일 것이다. 그리하면 주마등 같은 지난 세월에 부부의 두 눈은 말없이 촉촉해질 것이다.
공기의 소중함을 모르듯이, 부부간에도 같이 있을 때는 잘 모르다가 반쪽이 되면, 그 소중하고 고귀함을 절실히 느낀다고 한다. 가까우면서도 멀고, 멀면서도 가까운 사이다. 80순 넘어 보니 곁에 있어도 그리운 것이 부부다. 한 그릇에 밥을 비벼 먹고, 같은 컵에 입을 대고 마셔도 괜찮은 부부. 한 침상에 눕고, 몸을 섞고, 마음을 하나로 섞는 부부. 둘이면서 하나이고, 혼자 되면 외로워 병이 되는 게 부부다.
세상에 고독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젊은이는 아련하게 고독하고, 늙은이는 서글프게 고독한 것이 차이일까? 청년 때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에 떨고, 노년에는 죽음의 그림자를 보면서 떤다. 젊은이는 같이 있어 싸우다가 울고, 늙은이는 혼자 될 것이 두려워서 운다. 사실, 사람이 사랑의 대상을 잃었을 때보다 더 애련한 일은 없다. 그것이 부부일 때 더욱 그러하지 않을까 싶다.
젊을 땐 사랑하기 위해 살고, 나이가 들면 살기 위해 사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와 남편에겐, 청년에게는 연인이고, 중년에게 친구이며, 노 년에겐 간호사라는 말이 있다.
인생 최대의 행복은 부도 명예는 아닌 사는 날 동안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사랑을 나누다가 “난 당신 만나 참 행복했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고독한 인생 여정에서 ‘사랑하며 살아도, 남은 세월은 너무 빨리 지나가는데’ 그까짓 밥 한 술 안 먹는다고 고함을 지른 나의 죄를 깊이 뉘우치며 참회한다.
하지만 자꾸 야위어 가고, 기력이 쇠잔해 누워만 있는 아내에게 조금이라도 기력을 불어 넣어 주려는 이 남편의 애절한 마음을 몰라주는 아내가 눈꼽 만치라도 내 충정을 몰라주는 것 같아 마음이 안타깝다.
할 수만 있다면, 아내 대신 내가 아프면 좋겠다. 그런데도 집 안에서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이 못난 남편을 돌보기 위해 애쓰는 아내다.
아내는 한평생 우리 가정 지키느라고 무진 애를 다 쓰며 살아왔다. 그 덕분에 나와 가족이 잘살고 있다. 이제 죽어도 한 날 한 시에 손잡고 가고 싶다. 다시는 아내에게 아무리 화가 나도 고함을 치지 않겠다. “여보. 부디 이 못난 영감을 용서해주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 유튜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