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모] 참스승·바보 허병섭 목사···’행정학회’로 자유와 사랑 나눠
광야에 섰습니다
좁은 길에 섰습니다
맨 앞에 섰습니다
죽임 앞에 섰습니다
세상을 변혁하고자 하는 동지들이 있었습니다
지혜를 함께 물을 수 있는 도반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던져진 반짝반짝한 눈들이 있었습니다
나고 죽음보다 더 소중한 희망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가는 길 옷 한 벌 남기지 않았습니다
죽어 묻힐 무덤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알아볼 정신 한 올 남기지 않았습니다
물론 살아서는 아무런 빚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길이 되었습니다
생명이 되었습니다
희망이 되었습니다
사랑과 평화가 되었습니다
그는
죽음을 살아서
죽임을 죽인
자유인이었습니다
(김창수, 『꽃은 어디에서나 피고』에서)
허샘(허병섭 목사를 녹색대에선 이렇게 불렀다)의 일생을 총체적 시각으로 살펴보면 민중신학에 기초한 빈민공동체·생명공동체·영성공동체에 대한 지향과 실천으로 꿰어진다. 그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학으로 공부를 하고 평생 가난하게 살았으며, 가난한 이들의 친구요, 동지요, 도반이었다.
허샘은 민중해방운동 바닥에서 활동하다가 투옥을 당하는 등 수 많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성북구 하월곡동에 ‘동월교회’라는 빈민교회를 설립하여 몇 년 동안 목회 활동을 하다가 목사직을 반납하고 평신도로 살면서 ‘일꾼 두레’라는 건설노동자 공동체를 꾸리어 활동하였다.
그가 목사직을 반납한 것은 우리 사회에 성직자에 대한 특권을 인정하는 문화가 형성 되어 있어 부지불식간에 허샘 자신도 그러한 특권의 수혜자가 되어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더라도 일반인들과는 달리 성직자들은 고문과 같은 인권 침해를 덜 받는다거나 공공기관에 가더라도 성직자들에 대한 대우가 일반인들과는 다름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방패 막 없이 맴 몸으로 견뎌내며 살아야만 하는 민중들과 함께 행동하고 살아가면서 불의한 권력과 세력에 맞서 그러한 모순을 극복해가려는 의지 때문이었다.
1987년 이후 우리나라에도 점차 형식적 민주화가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허샘은 또 다른 꿈, 즉 생명살림의 꿈을 꾸게 된다. 자신이 믿는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어진 인간들이 국가나 자본에 의한 폭력으로 고통 받고 있는 것을 전면 거부하였던 허샘의 눈에 또 다른 민중, 생태계의 모습이 보인 것이다. 그는 몇 년 동안 환경문제에 대한 공부를 하거나 현장을 목도하면서 생명해방운동의 기지로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를 택하여 귀농을 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서 생태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무주 ‘푸른꿈고등학교’설립 공동추진위원장과 함양 ‘녹색대학교’설립 운영위원장을 맡아 활동을 하게 된다.
허샘은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힘든 ‘까르마 요기'(실천적 삶을 통한 영적 해방을 이뤄가는 수행자)였다. 구체적인 일이나 사건 속에서 타인과 만나거나 온갖 존재들과 만나면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주시하며 자기완성을 이루어 가는 수도자였다. 허샘은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야말로 ‘공생애’를 살았다.
누가 무엇이 필요하다고 하면 자신이 가진 것을 그 자리에서 내어주고도 아무런 흔적을 남기지 않는, ‘나’가 없는 사람이었다. 추운 몸으로 부서지고 불에 타면서, 버려지고 피 흘리면서도 금가고 이글어진 것들을 사랑하고 상한 살을 헤집고 입 맞추며(김남조의 시, ‘생명’ 부분 인용) 살았다.
허샘과 내 인연은 ‘푸른꿈고등학교’에서 시작해서 함양 ‘녹색대학교’까지 10년 넘게 이어진다. 내가 허샘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9월 전북 무주군 안성면 진도리 허샘 댁에서였다. 당시 허샘 부부는 1995년부터 진도리에 귀농하여 두분이 알콩달콩 행복하게 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 때 나는 ‘푸른꿈학교’설립 추진위원장으로 학교 터를 구하려 사방팔방을 헤집고 다니던 중이었는데, 허샘의 소개로 허샘 집 근방에 소재한 폐교를 구입할 수 있었다.
1년 넘게 찾아다녔지만 구하지 못했던 학교 터를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었던 것은 허샘의 선한 영향력 아니고서는 도저히 설명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다. 그런 연유로 자연스럽게 허샘을 학교설립공동추진위원장으로 영입하게 되었다. 문동환 목사를 지도교수로 하여 한신대학교에서 기독교교육을 전공하였던 허샘에게도 자신의 꿈인 생명해방교육의 현장을 만나게 된 계기이기도 하였다.
학교를 만드는 과정에서 허샘과 모든 면에서 의견을 같이한 것은 아니다. 허샘은 학교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면 이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이건 처음 만난 사람이건, 전문성이나 능력이나 인격과 상관없이 무작위로 추천하여 나를 곤란하게 하곤 하였다. 허샘을 찾아와서 일하게 해달라고, 어떤 한 일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 허샘은 그가 말한 그대로 추천하였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기도 하였다. 일을 하려면 합리적인 인력 배치와 관리가 중요한데, 일이 필요한 사람에게 일자리를 만들어주라는 허샘의 생각을 수용하기가 참 어려웠다.
허샘과의 의견 차이에도 불구하고 내가 허샘을 존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허샘의 소유에 대한 자유함과 무아에 가까운 삶 때문이었다. 무엇도, 어떤 자리도 가지려고 하지 않는 허샘의 빈 마음이 너무 커서 나를 불편하게 하는 작은 것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허샘이 전북 무주군 진도리 광대정에 집을 짓고 집들이를 하던 날, 평생 처음으로 집을 당신 앞으로 소유하던 날 허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난다.
허샘은 그 작은 집을 소유하고 살게 된 것조차 과분한 욕심이라 말하면서 누구든 그 집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내놓겠다는 말을 하면서 민망해하였다. 그래서 내셔널트러스트 운동에 선뜻 그 집과 광대정에 소재한 땅을 기부하였으리라!
‘녹색대학교’ 설립과 운영으로 이어진 허샘과의 인연의 마지막 자락에서야 나는 허샘과 나와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었다. 허샘은 성직자였고, 방장이었다. 그는 일보다는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경영자나 주지가 아니었다. 경영자가 갖추어야 할 합리적 상황판단 능력과 대책마련 능력보다, 사람을 먼저 살피는 선생이었다.
나도 가끔 허샘 흉내를 내보려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느낀다. 합리적 일처리가 우선 눈에 먼저 들어오는데, 그 다음에야 사람이 보이는데, 허샘을 흉내 내기가 만만치 않음을 절실하게 느낀다. 그러나 그런 나를 보며 내 아내는 나도 대중 앞에서 일을 이끌어 가는 사람으로서는 허점이 너무나 많다고 말한다. 사람을 쉽게 믿다가 발등을 찍힌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지 않느냐고 핀잔을 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의 발등을 얼마나 찍었을까, 그래서 그들에게 얼마나 깊은 고통과 좌절을 주었을까를 생각해 본다.
‘녹색대학교’에서 보여준 허샘이 내 가슴을 뭉클하게 한 두 가지 행적만 들어본다. 2003년 녹색대학교가 개교했던 첫 해, 허샘이 어느 재단에서 주는 상을 받은 적이 있는데 부상으로 오백만원을 받아와서는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그것을 몽땅 학교에 기증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는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외부강연을 하고 학교로 돌아오면 받은 강사료를 학생들에게 나누어주며, 고스톱을 치면서 일부러 잃어주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실재로 그런 현장을 목격한 적도 있다.
2014년 봄, 학교가 개교한지 두 번째 해였던 어느 날 허샘이 외부 강연을 갔다가 돌아오자 학부생들이 허샘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자리에서 학생들이 허샘에게 오늘도 ‘행정학회’가 열리냐고 물었다. 허샘이 “당연하지”라고 대답을 하는 것을 보면서 뭔 놈의 학회를 아무 준비도 없이 오늘 밤에 연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허샘은 그런 나를 보면서, 밤에 허샘 연구실에서 ‘행정학회’가 열리는데 나에게도 학회에 참가하라고 권했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고자 한 번 참가해보리라 마음을 먹고 밤에 허샘 연구실로 가니 허샘과 학생들이 모여 고스톱을 치고 있었다. 내가 가자 허샘이 내게도 고스톱 판에 끼라고 권하였다. 참 어이없는 상황에 부딪혀 당황스러웠지만, 오후에 학생들이 말한 ‘행정학회’가 고스톱(Go and Stop) 치기였음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알고 보니 허샘의 고스톱 판은, 허샘 당신이 받아온 강의료를 학생들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나누어주는 현장이었다. 부모에게 의지하지 않고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가난한 학생들에게 그들의 처지를 보아가며 잃어 주는 모습은 허샘의 모습에서 나는 참 선생을 보았다.
무등산에 솔성수도원을 만들면서 허샘을 수도원으로 모셔서 허샘이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하자고 김한중 목사와 뜻을 모았는데, 우리들은 물론이고 우리 지혜학교 아이들에게 큰 어른을 만날 수 있게 해주려 하였는데, 안타깝게도 허샘과 부인 이정진샘이 2009년 1월, 거의 한 날 한 시에 원인불명의 병으로 쓰러져 요양원 신세를 지다 돌아가셨다.
나는 허샘이 병상에서 내게 들려주고 싶은 소리 없는 소리, 그래서 고막을 찢을 것 같은 큰 소리를 놓치지 않으려 한다. “교육자는 경영자가 아니다. 선생은 늘 자신을 성찰하며 아이들에게도 깨우침을 독려하는 길잡이여야 한다. 교장도 행정가 이전에 선생이다.” 이래서 허샘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이 되었다.
허샘은 대중적 지도자로서는 실패하신 분이다. 대중들에게, 미래를 먼저 보는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영양가 없는 사람이고, 현재를 깊게 보는 사람은 대중들에게 자기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게 하는 고통을 강제하는 사람이다. 영양가 없고 자신을 성찰케 하는 허샘의 삶은 무지한 사람들에게는 바보같이 보였고 탐욕에 사로잡힌 이들에게는 큰 질책이었다.
1998년 8월초 ‘푸른꿈고등학교’교정 플라타나스 나무아래에서 허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나는 허샘께, ‘목사님 삶은 실패의 연속이 곧 성공처럼 보인다’고 말씀을 드렸다. 세계의 흐름을 멀리 볼 줄 아는 사람은 현실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실패해서 성공한 사람 허병섭! 사람들은 성공해서 하수구처럼 구린 냄새를 풍기다 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침을 뱉는다. 그러나 실패하여 성공적인 삶을 살아낸 이들을 인류는 성현으로 추앙하고 닮으려 한다.
허샘은 내게 그 어눌한 말솜씨로, 말 사이의 행간으로 큰 가르침을 주었다. 실패해서 성공하라고, 예수가 그랬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