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시] ‘시인과 소설가’ 오탁번

2009년 6월 ‘국보(國寶) 순례 시낭송회’ 기자회견 당시 오탁번 시인. <출처 경향신문 자료사진>

어느 날 거나하게 취한 김동리가
서정주를 찾아가서
시를 한 편 썼다고 했다
시인은 뱁새눈을 뜨고 쳐다봤다
ㅡ어디 한번 보세나
김동리는 적어오진 않았다면서
한번 읊어보겠다고 했다
시인은 턱을 괴고 눈을 감았다

ㅡ꽃이 피면 벙어리도 우는 것을……
다 읊기도 전에
시인은 무릎을 탁 쳤다
ㅡ기가 막히다! 절창이네그랴!
꽃이 피면 벙어리도 운단 말이제?
소설가가 헛기침을 했다
ㅡ’꽃이 피면’이 아니라, ‘꼬집히면’이라네!

시인은 마늘쫑처럼 꼬부장하니 웃었다
ㅡ꼬집히면 벙어리도 운다고?
예끼! 이사람! 소설이나 쓰소
대추알처럼 취한 소설가가
상고머리를 갸우뚱했다
ㅡ와? 시가 안 됐노?

그 순간
시간이 딱 멈췄다
1930년대 현대문학사 한 쪽이
막 형성되는 순간인 줄은 땅뜀도 못하고
시인과 소설가는
밤샘을 하며
코가 비뚤어졌다
찰람찰람 술잔이 넘쳤다

– 오탁번(1943~2023) 시집 <시집보내다> 문학수첩, 2014

서정주와 김동리(왼쪽부터). 1972년 <서정주전집> 출판기념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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