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별세 이상준 외대 명예교수의 31년 전 신문칼럼 “언어폭력이 더 문제다”
[아시아엔=연합뉴스] 자전 소설 <영어정복자>(2003) 등을 펴낸 이상준(李相俊) 한국외대 영어과 명예교수가 25일 오후 7시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유족이 전했다. 향년 87.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고인은 한국외대 영어학과,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광주서중 3학년 여름방학 때 영문법을 파고들어 영어를 익힌 경험을 자전 소설인 <영어정복자>(2003)에 담아 펴냈다.
숭문고 영어 교사를 거쳐 2001년까지 한국외대 영어과 교수로 강단에 섰고, 이 대학 외국어교육연구소장, 언어연구소장, 사범대학장, 외국어연수평가원장, 외국학종합연구센터 원장 등을 역임했다. 한국외대 교수협의회장을 맡아 각종 시국선언에 앞장섰다.
‘고시고급영어'(1983), ‘영작문정복'(2019) 등 영어와 관련된 책 외에도 시집과 수필집을 여러 권 펴냈다.
유족은 부인 이행자씨와 사이에 3남(이승재 전 한국IBM 본부장, 이승윤, 이승태 나이스신용평가원 상무)과 며느리 김명선·임철희씨 등이 있다. 빈소는 경희의료원 장례식장 302호실, 발인 28일 오전 8시. 02-958-9721
1991년 6월 정원식(1928∼2020) 당시 국무총리 서리가 외대에 갔다가 밀가루 세례를 받은 뒤 학생들이 제적 처분을 받자 <한겨레신문>에 “나는 그들(학생들)의 폭력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폭력을 결과론적 입장에서만 보지 말라는 것이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한겨레신문> 기고 글.
‘언어의 폭력’이 더 문제다
나는 인류 최대의 적을 폭력이라고 본다. 그것은 유형적 곧 물리적 폭력과 무형적 곧 정신적 또는 언어적 폭력으로 나뉜다. 우리 사회는 특히 해방 직후부터 폭력에 의해 찌들어왔다. 하나의 폭력이 다른 폭력을 낳곤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그런데 폭력의 속성은 누적되고 가중되는 것이다. 손바닥으로 뺨을 갈기는 폭력은 주먹으로 얼굴을 되받아치는 폭력을 낳는다. 이것은 급기야는 철퇴를 휘두르는 데까지 이른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이 폭력의 악순환에 시달려와 그것의 정점에 이른 것이다. 길거리에서는 대낮에 쇠파이프로 사람을 쳐서 즉사시키는 폭력에까지 이르렀고 학원에서는 학생들이 교수에게 달걀을 던지고 밀가루를 뿌리는 폭력에까지 이른 것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이러한 극단적인 일련의 폭력을 바라보면서 물리적인 폭력보다 무형적인 언어의 폭력이 더 무섭다는 것을 몸서리치게 느낀다.
우선 가깝게는 지난 4월26일 일부 전경들에 의한 폭력사건은 “폭력 정권” “살인 전경” “살인마” “노 정권이 민주 열사를 다 죽인다”와 같은 언어적인 폭력을 대학가의 대자보에 불러일으켰다.
지난 6월3일에 발생한 학생들의 폭력은 전국을 온통 “반인륜” “반도덕” “패륜아” “반민주” “반지성”과 같은 언어적인 폭력의 도가니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그뿐인가. 소수의 신문을 제외하고 대다수의 신문들은 당일인 3일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다음날인 4, 5일자의 논단을 비롯한 온 지면을 언어적인 폭력으로 가득 메웠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국외대 쪽에서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다음날 이른 아침 오전 8시에 긴급교수회의를 소집하고 거기서 단 몇분 동안 몇몇 교수들의 발언을 청취한 뒤에 무려 11명의 학생에게 학사처벌의 극형인 제적처분을 내렸고, 성명서에서는 “그 수의 다소를 불문하고” 앞으로도 계속 중징계를 하겠다고 했다. 그 대학에 봉직하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자식을, 자식은 아버지를 고발하지 않는다는 동양의 윤리의식이 아쉽게 느껴진다. 무엇이 그렇게 급해서 보다 철저한 전후 진상조사를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던가? 무엇이 그렇게 죽을죄가 되기에 아버지가 많은 자식들을 스스로 극형에 처할 수밖에 없었던가? 과연 그러한 조급성과 최후의 수단이 스승의 권위를 세워주는 것인가? 대학가 대자보에 써붙인 “살인 전경들”이 정말로 살인자들이었던가? 그것은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던가? 다만 쇠파이프를 손에 들고 있었다는 것이 계획적인 것이라고 몰아붙여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언론보도에 나타난 “패륜아들”이 과연 반인륜적 인간들이었던가? 그것은 역시 젊음의 순간적이고 우발적인 행동이 아니었던가?다만 달걀과 밀가루를 미리 준비했다는 것이 계획적인 것이라고 몰아붙여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왜 이리들 호들갑을 떠는가? 왜 이리들 소아병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 그렇게 어린이들처럼 말로 일시적으로 와 떠들어대다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던가 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우리의 수준이 아닌가? 나는 화염병과 돌멩이가 날아 들어오는 틈바구니에서 공권력을 수행하는 와중에 강경대군을 타살한 전경들을 이해한다. 나도 그런 상황에서는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을는지 모른다. 그들은 상식과 양심을 갖고 있는 어엿한 대한의 젊은이들이다.
나는 정원식 국무총리서리에게 봉변을 안겨준 주모자들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누구 못지않게 지성과 양식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었다. 나도 그러한 위치에 있었다면 그런 행동을 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들의 폭력을 두둔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의 폭력을 결과론적 입장에서만 보지 말라는 것이다. 그 두 가지 사건을 결과만을 놓고 보면 그들은 틀림없는 “패륜아들”이다.
원인 없이 결과만 있을 수 있는가? 오늘날 우리사회의 행동양태는 열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무조건 해열제만을 쓰면서 호들갑을 떠는 돌팔이 의사의 행동양태와 같다. 명의는 말없이 묵묵히 발열의 원인을 찾아 근본치유법을 찾는다. 우리의 정치지도자 또는 사회지도자들은 과연 돌팔이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수준은 우리 언론의 수준과 맞물려 있다. 극소수의 신문들을제외하고서 “편파보도”는 대부분 신문들의 별칭이 된 지 오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신문보도 보다는 대학가의 대자보를 더 믿어왔다. 얼마 전 독일의 콜 수상은 어떤 모임에서 달걀세례를 받았고, 우리의 야당지도자 한 사람도 그가 크게 지지를 받는 지역에서 달걀세례를 받았다. 그런데 유독 이번 정원식 국무총리서리의 달걀세례 장면은 밀가루와 범벅이 되어 극적인 효과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사진은 신문 1면에 크게 실려 봉변당하는 “재상”을 돋보이게 했다.
국민은 “충격과 경악과 분노” 속에서 “말세”를 보는 것 같았다. 언제나 우리 사회는 물리적인 폭력의 악순환과 그것이 낳는 언어적인 폭력의 이중적인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끝으로 나는 사건 대학의 교수의 입장에서 정원식 국무총리서리에게 유감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우리 사회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과연 젊은 학생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가 반성의 자문을 해본다. <외대 교수. 교수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