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늦가을 문답’ 임영조
그 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아하! 무릎 칠 때는 이미 늦가을
억새꽃이 절레절레 제 생을 부정하듯
서릿발 쓴 체머리로 돌아갈 때다
잎 다 진 청미래 덤불 가시에 찢긴
저녁 해가 선혈이 낭자하게 저문다
잡목숲 질러 식은 조각달 물고 가는
저 부리 길고 뾰족한 홀아비 새는
거느리는 식솔이 몇이나 될까
내 빈 속이 문득 궤양처럼 쓰리다
어서 그만 내려가자, 더 늦기 전에
가랑잎같이 따뜻하게 잘 마른
어느 老시인의 손이라도 잡아볼까나
나는 아직 선뜻 내놓을 게 없어서
죄송죄송 서둘러 하산하는데 어!
싸리나무 회초리가 어깨를 후려친다
짐스런 생각마저 털고 가라고?
산에 와 깨치는 늦가을 문답.
– 임영조(1945~2003) 시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민음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