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음악] ‘텅빈 우정’ 심보선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손으로 쓰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손이 무한정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미소를 짓습니다.
나는 주사위를 던지듯
당신을 향해 발걸음을 옮깁니다.
그 우연에 대하여
먼 훗날 더 먼 훗날을 문득 떠올리게 될 것처럼
나는 대체로 무관심하답니다.
당신이 텅 빈 공기와 다름없다는 사실.
나는 고백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 당신의 입으로 말하게 할 것입니다.
당신은 자신의 투명한 입술이 하염없이 떨리는 것을
견뎌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신비로운 일이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 날.
내일은 진동과 집중이 한꺼번에 멈추는 날.
그다음 날은 침묵이 마침내 신이 되는 날.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동시에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처럼.
당신과 내가 원하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동시에 끝날 것입니다.
– 심보선(1970~ ) 시집, ‘눈앞에 없는 사람’, 문학과지성사,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