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표 새 국회의장께 일독을 권합니다
전두환 대통령 때인 제11대 국회는 국회의장이 모두 국가보위입법회의 출신이었습니다. 제5공화국 출범 뒤 구성된 제11대 국회의 전반기 국회의장은 정래혁 3선 의원, 후반기 국회의장은 채문식 4선 의원이었습니다. 국회부의장도 야당 몫으로 선출된 6선의 김은하 전반기 부의장을 빼고 모두 입법회의 출신입니다.
국가보위입법회의는 전두환 신군부가 제10대 국회를 해산시키고 제11대 국회가 구성될 때까지 국회의 권한을 대행했던 과도입법기구입니다. 헌정사상 과도입법기구는 셋이었습니다. 첫 번째 과도입법기구는 1961년 5.16 쿠데타 직후의 국가재건최고회의입니다. 최고회의는 현역군인들이 3권을 총괄하던 초헌법적 기구였습니다.
두 번째 과도입법기구는 1972년 10월 유신체제 출범 직전의 비상국무회의였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비상대권을 발동해 10.17 대통령특별선언에 그 설치근거를 마련하고 헌법개정안까지 처리한 초헌법적 과도입법기구였습니다. 세 번째 과도입법기구가 바로 국가보위입법회의인데 첫 번째 두 번째와는 달리 헌법기구였습니다.
비록 헌법에 설치근거가 있었지만 대의기관으로 볼 수 없습니다. 정당이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대통령이 국가보위입법회의 구성원을 임명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구성원의 일부가 현역군인이었고, 그들이 실질적으로 운영을 주도했습니다. 제11대 국회 전후반기 의장인 정래혁 채문식은 모두 입법회의 부의장 출신이었습니다.
정래혁 의장은 제9대 정일권 의장에 이어 두 번째 군 출신 국회의장입니다. 세 번째 군 출신은 강창희 제12대 국회의장입니다. 6선의 강 의장은 중령으로 예편해 장성 출신은 아니나 하나회 회원이었습니다. 국회의장은 아니나 군 출신인 이춘구 의원이 제14대 후반기 국회부의장을 지냈는데, 그 뒤로 군 출신 의장단은 없습니다.
이밖에 최장수 국회부의장인 장경순 부의장이 5.16 군사쿠데타에 참여했던 정치군인이었습니다. 장 부의장은 5선 의원이었지만 초선인 제6대 국회 때 부의장이 되었고, 제7대 부의장에 이어 제8대까지 10년 동안 국회부의장을 했습니다. 1971년 박정희 대통령이 국회를 해산시키지 않았다면 국회부의장을 더 오래 했을지도 모릅니다.
정래혁 의장은 5.16 군사쿠데타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군정에 참여해 현역군인 신분으로 36세에 상공부장관이 되었고, 제3공화국 출범 뒤 군에 복귀했습니다. 예편 뒤 44세에 국방장관이 되었다가 1971년 실미도 사건으로 물러났습니다. 유신체제에서 두 차례 국회의원을 했고, 전두환 대통령 임명으로 국가보위입법회의 부의장이 되었습니다.
정래혁 의장은 제5공화국 수립 후 실시된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민정당 공천으로 3선이 되었습니다. 신군부 실세들이 대부분 초선이었던 탓에 정 의원이 국회의장이 되었습니다. 국회의장 임기를 마친 뒤 민정당 대표를 맡았다가 투기와 부정축재가 문제가 되어 재산을 기부헌납하고 정계를 떠났습니다.
당시 여야당 모두 최다선 의원이 6선이었는데 3선이 국회의장이 되었습니다. 야당의 김은하 의원은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이 되었고, 입법회의 출신이 아니었던 여당의 이재형 의원은 제12대 국회의장을 지냈습니다. 1960년 4.19 혁명 뒤 50일 정도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을 지냈던 이 의장은 군부독재의 마지막 국회의장을 지낸 겁니다.
이재형 국회의장은 실세가 아니었기에 민정당 주류 세력과 마찰을 빚기도 했으나 독재정권에 충실했습니다. 1986년 유성환 의원의 ‘국시론 파동’ 때 유 의원의 마이크를 꺼버리기도 했고, 체포동의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경호권을 발동해 야당의원의 출입을 막기도 했습니다. 국회의원이 원내발언으로 체포된 첫 사례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