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질’에 닿기 위한 질문들···’왜 사는가?’ ‘제대로 살고 있는가?’

일만 하면서 앞만 보고 달리던 사람이 어느 날 낯선 질문에 빠지기 시작한다. 나는 왜 사는가?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 나는 제대로 살고 있는가? 누구나 인정하는 참된 가치는 존재하는가? 이런 질문들에 빠지면 대개는 내면에서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생활도 이전과 결이 달라지면서 많이 흐트러질 수 있다. 기존의 것들이 다 뒤틀린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본 적도 없는 곳으로 이끌리며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10대나 20대에 이런 질문에 봉착하기도 하지만, 보통은 40대 50대에 일어나는 일들이다.

왜 사람들은 앞만 보고 열심히 달려가는 삶을 살다가 갑자기 이런 질문에 빠지는가? 이 나이가 되면 어느 정도 성취도 얻지만 열심히 앞만 보고 달려온 데서 오는 피로감을 느끼고 스스로 지치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위기감에 빠지기도 한다. 그래서 잠시 멈춰 서서 본질적인 질문들로 삶의 의미를 따져보는 일은 버겁기도 하지만 약간은 고상해 보이기도 하면서 위로를 주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 앞에서 스스로 지쳤다거나 고갈되어 간다는 느낌에 빠진 채, 자신이 좀 약해진 것이 아닌가 걱정하면서 의기소침해지기도 한다. 그러면서 위로나 휴식이 필요하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려 한다. 많이 지쳐서 위로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지쳤다는 그 기분은 한 걸음도 더 나갈 수 없을 정도의 장벽이나 절벽 앞에 선 것과 같은 부정적 심리 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오히려 기능적이고 양적으로 살던 삶이 정점을 찍거나 한계에 도달한 후, 고도를 높이지 않으면 안 되는 절실한 필요가 생겼기 때문에 질적 상승을 위해 혁신의 대문 앞에 선 상태일 것이다. 기능적이고 양적인 삶의 고도가 자신의 크기만큼 높아지면 한계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이전에 경험한 적이 없는 환경에 처하는 기분이 들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지금까지의 삶에 직접적으로 등장한 적 없는 한 단계 더 높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될 것이다.

‘왜 사는가?’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이 제기되는 이유는 지칠 만큼 지쳐서 휴식이나 위로가 필요한 것이 다가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휴식 다음의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라는 전진의 명령 앞에 서 있는 중일지도 모른다. 약해져서가 아니라 혁신의 요구 앞에 선 상황이다. 사실, 본질이나 근본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들은 기능적인 것들보다 높다.

왜 사는가, 삶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직면했다는 것은 그런 가치나 본질이 작동하는 높이를 향해 내몰리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낯선 질문들은 질문자의 수준이 높아지고 있음을 자신과 세상에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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