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갑 맞은 최진석 교수는 왜 자신의 탯줄을 찾았을까?
독자께선 회갑을 어떻게 맞으셨는지요? 앞으로 다가올 회갑을 어떻게 맞으실 예정인지요? 서강대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건명원 초대 원장을 지낸 최진석 교수는 지난달 회갑을 맞아 자신의 始原을 찾아 이렇게 소회를 밝혔습니다. <아시아엔>은 최진석 교수의 글을 전문 그대로 소개합니다. 최 교수의 왕성한 연구 크게 기대하고 힘껏 응원합니다. <편집자>
2월17일은 제 회갑 날이었습니다. 우주 대자연이 허락한 60 갑자 한 바퀴를 죽지 않고 돈 것이죠. 한 바퀴 돈 것도 대단한 일이지만, 다음 한 바퀴를 어떻게 돌 것인가도 중요한 문제입니다. 16살 좌우부터 외우기 시작하여 선택의 갈래 길에 설 때나 삶이 종잡을 수 없게 될 것 같은 두려움이 찾아 들 때 웅얼거려보던 시 한편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이 시 한편을 송곳삼아 겨우 살아왔습니다. 이러하니 회갑 날 즈음에 이를 다시금 떠 올리는 것이 제게는 당연하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 시는 바로 유치환의 “생명의 서”입니다.
생명의 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를 구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 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에 회한(悔恨)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시가 내게 말했습니다. “또 다시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배우기 시작하라.” 그래서 회갑 날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찾는 매우 인위적인 일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새로운 다음 한 바퀴를 위해서.
나는 함평(咸平)이 고향이지만, 출생지는 하의도(荷衣島)에 굵은 지렁이처럼 붙어 있는 장병도(長柄島)라는 섬입니다. ‘장병’은 ‘긴 자루’라는 뜻이겠죠? 길게 누워있는 섬의 모양을 따라 이름이 그리 되었을 것입니다. 면적은 1.63㎢에 불과한데, 해안선 길이가 7.5㎞나 되니 긴 모양으로 되어 있을 것이 짐작이 됩니다. 60여년 전 젊은 제 아버지는 하의국민학교 장변분교로 발령이 나자, 자그마한 어머니와 함께 이 섬에 오셨을 것입니다. 젊고 키 작은 제 어머니는 입도(入島) 1년여 만에 학교 관사의 좁고 어둑한 방에서 저를 낳으셨습니다.
장병도는 행정구역상으로는 하의면 후광리(後廣里)에 속합니다. 김대중 대통령의 호 후광(後廣)은 후광리의 지명을 딴 것입니다. 아버지는 제 이름을 장병도의 지명을 따서 지었습니다. 장병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는 섬을 ‘진절’이라고 부릅니다. ‘긴 자루’의 전라도 식 발음이 ‘진 자리’였을 것이고, 이것이 세월을 이겨내며 ’진절‘로 굳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여기서부터는 아버지께서 저 세상으로 가시기 전에 해주신 말씀입니다. 확인할 길도 없고 믿기 쉬운 말도 아니라서 참 거시기 합니다만, 재미로 남겨봅니다.
아들의 입신양명을 너무 강하게 원하시다보니 아버지 스스로 만들고 아버지 스스로 믿어버리신 것일 수도 있겠지요. 어머니는 제가 세상에 나온 시간을 ‘돼지 밥 줄 때 쯤’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사주를 풀 때 그 시간을 그냥 ‘유시’(酉時)로 간주합니다. 바로 그날 이른 아침에 동네 어귀에서 몇 사람이 모여 담소를 나누다, 전날 밤 서로 같은 꿈을 꾼 것을 알게 되었다 합니다. 꿈 내용이 어땠는지는 모릅니다. 이장이 그 길로 아버지를 찾아와 해질 때까지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말라고 했다 합니다. 그리고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않은 그날 ‘돼지 밥 줄 때 쯤’ 어머니 배 속에서 제가 나왔습니다.
꿈 이야기의 사실 여부는 모르겠습니다만, 여기서부터는 사실입니다. 아버지는 이른 아침에 찾아왔던 이장 등의 권유도 있고, 출생지의 정기를 담아주면 좋을 것 같아서 호적에 제 이름을 ‘최진절’(崔珍?)로 올리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최진절’이 되었습니다.
‘최진절’이는 4살 정도까지 ‘진절’에 살다가 부모를 따라 내륙 함평으로 옵니다. 함평으로 와서 아버지는 아들 이름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셨습니다. ‘진절’에서야 진절이라는 이름이 듣기 좋은 말이지만, 함평에서는 사람들마다 내 이름을 듣자마자 ‘진절머리 난다’는 단어를 떠올리고, 그 말을 꼭 한 번은 하기 때문입니다. 고민하다가 개명을 결정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공식적으로 절차를 밟아 개명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아들 사랑이 바위보다 굳건하고 산보다 더 큰 아버지는 어떤 일이라도 하실 참이셨겠죠. 결국 호적 원부 열람을 하십니다. 전남 함평군 손불면(孫佛面) 사무소였을 것입니다. 부처의 뜻을 잇는 자손들이 사는 땅이라는 이름을 가진 손불면 사무소에서 아버지는 공문서 위조를 감행하십니다.
최진절에서 ‘절’(?)은 ‘재’(才)로 시작하는데, 이 ‘재’(才)변에 준비해 가신 만년필로 몰래 한 획을 내려 그어 ‘목’(木)으로 고쳐버리십니다. 그러면 ‘석’(?)이 됩니다. 그래서 저는 ‘최진석’(崔珍晳)으로 재탄생 합니다. 최소한 이름으로는 더 이상 진절머리 나는 놈이 아니게 되었죠.
‘원시의 본연’을 찾는 여정에는 제자 김재익과 이민규도 함께 했습니다. 목포에서 오전 10시 반에 출발한 배 ‘남신안농협6호’는 12시경 장병도 선착장에 도착합니다. 배가 당도하는 수선스런 소리와 짐을 받으러 온 두어 명의 사내가 사라지면서 선착장에는 선착장만 남았습니다. 거기에 우리 넷은 마치 연기처럼 가볍게 겨우 존재합니다. 여전히 그렇게 작은 섬입니다. 당황스럽게 겨우 서서 우왕좌왕 하고 있던 차에 훤칠한 키의 한 사내가 새로 보였습니다. 붙잡아야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얼굴은 다 가려 기다란 눈매만 보였습니다. 사내는 우리에게 이 섬에는 가게도 없고 식당도 없다는 절망스런 정보를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투박하지만 다정스럽게 식사를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는 한 걸음 더 깊은 자상함을 보였습니다. 마을회관에 말해놓을 테니 가서 라면이라도 끓여 드시라고…. 그리고는 또 재빨리 사라졌습니다.
넷은 마을회관으로 갔습니다. 우리 어머니 늙으셨을 때와 비슷하게 생기신 할머니들이 4분 앉아계셨습니다. 할머니들은 늙으면 다 비슷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습니다. 그 사내가 이미 우리가 올 것이라는 것을 말해 놓은 분위기였습니다. 어떤 할머니는 벌써 라면 봉지 두어 개를 뜯고 계셨습니다.
주방으로 향하시던 할머니가 뒤돌아보며 물었습니다. “믓헐라고 여그까지 와겠다요?” 내가 답했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여기 선생님으로 계실 때 여기셔 나를 낳으셔서 한 번 와 봤습니다.” “선생님 성함이 으쯔고 되시오?” “최현기 선생님이십니다.” “그라믄 댁내가 큰 아들이요? 우게 딸이 둘 있었는디…” “예, 큰 누님은 중학교 때 돌아가시고…제가 큰 아들입니다.” “그라믄 이름이 진절일 것인디? 진절이요?” 나는 이 대목에서 소름이 돋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들은 적이 있던 그 ‘진절머리 나는’ 이름을 생전 처음 보는 할머니로부터 듣는 일은 충격적이면서 신비했죠.
할머니는 4학년 때 아버지 제자라고 하시더군요. 할머니는 아버지를 아주 선명하게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당시 섬에서는 일 시키느라 여자애들은 학교에도 보내려 하지 않을 때, 아버지가 집까지 찾아와 이제는 여자도 배워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설득하여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는 얘기도 해 주셨습니다. 심지어 아버지가 병역을 마치지 않은 것 때문에 여러 곤란한 상황에 직면했던 것까지도 기억하셨습니다. 내 아버지는 육손이셨습니다. 그런 연유로 군대를 가지 않으셨고, 엄혹하던 시절에 군대 다녀오지 않은 것으로 인해 이런저런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셨던 것을 나도 어렴풋이 들어서 알고는 있었습니다. 게다가 내 태(胎)를 학교 어디에 묻은 것 까지 기억하셨습니다. 할머니는 태를 암투라고 하시더군요. 아마도 진절에서는 태를 그렇게 부르는 모양입니다. 이런저런 것들을 확인하고 있던 차에 어떤 사내가 들어왔습니다. 아까 노인회관에 가서 라면을 끓여 먹으라고 알려주었던 그 사내였습니다. 사내는 바로 그 할머니의 아들이었습니다. 다시 한 번 소름이 돋았습니다. 나는 마치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그 사내를 만나게 한 일부터 모두 인도하고 계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매우 묘한 기분에 쌓였습니다.
그리움이 길고 깊으면 육화되어 기억이 되는 모양입니다. 마을회관을 나와 장병분교로 향하는 길은 낯설지 않았으며, 교정은 키 작은 내 어머니의 치마폭 딱 그 크기였습니다. 외딴 섬, 교실 한 칸의 조그만 학교의 2월 중순은 참 따뜻했습니다. 당시는 장병도 선착장이 크지 않아서 큰 배가 들어오지 않아 자그마한 나무배가 바다 가운데 서 있는 큰 배까지 가서 손님을 받아왔는데, 큰 배에서 내려 작은 배로 갈아탈 때 얼마나 무서웠었는지를 떨면서 말씀해주시던 어머니의 손을 꼭 잡아드렸던 생각이 납니다. 어머니의 손을 잡아드리던 나는 초등학교 4학년 정도였습니다. 젊디 젊었던 내 부모가 부족한 것 천지였을 이곳에서 나를 낳으며 어떤 상념에 젖었을지 생각만 해도 조금이나마 철이 드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첫 아들이 ‘돼지 밥 줄 때쯤’ 태어나자 그 아들이 끌고 나온 태를 고이 싸서 묻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자리에 묻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당시 아버지는 학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자리를 찾아 내 ‘원시의 본연’을 깊숙한 땅 속에 감추셨지요. 그래서 내 암투는 내가 다시 찾을 때까지 장병분교가 서 있는 땅 아래 60년 동안 묻혀 있었습니다. 내게 물질로 화한 내 ‘원시의 본연한 자태’는 바로 그 태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함께 만들고, 어머니와 내가 공유하다 나를 따라 세상에 나온 것. 나는 회갑 날, 바로 그 ‘태’를 찾은 것입니다. 장병도의 진절이는 ‘원시 본연’의 ‘나’인 ‘암투’를 향해 느리고도 깊은 절을 올렸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도 나를 배려해주느라 느리고도 깊었습니다. 내가 나에게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내 새로운 한 바퀴는 이렇게 다시 시작합니다.
최진석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