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정명호 저 <욕망을 이롭게 쓰는 법>

욕망은 원초적으로 타고나는 것이고 생을 이끄는 엔진과 같은 것이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기에 욕망을 제거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할 것이다. 또한 이를 죄악시 해서도 안 된다. 이미 욕망의 산물로 세상에 나온 인간들은 그 욕망의 힘으로 생존과 동시에 욕망에 이끌리거나 욕망을 발판삼아 각자의 생애를 살다가 또 다른 욕망의 개체를 생산하고 세상을 떠난다. 그때서야 비로소 욕망의 끈에서 해방된다. 하지만 이미 자신의 욕망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또 다른 자아가 세상에 존재한 후이다.

우리는 욕망으로 인해 일어서고 욕망으로 인해 쓰러진다. 욕망으로 인해 삶의 의욕을 갖게 되고 욕망으로 인해 좌절한다. 욕망으로 인해 사람과 사물과 자연과 신과 무수히 많은 형태의 관계를 형성하며 살아가게 된다. 욕망에 의해 형성된 인간의 존재양식을 개성 또는 자아라고 부른다. 그것을 누구는 실존, 누구는 운명, 또 누구는 은총이라고 말한다.  

이율배반적이고 변화무쌍

욕망의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욕망의 분량과 크기는 한정이 없다. 작은 욕망이 달성되고 나면 더 큰 욕망이 눈앞에 나타난다. 하나의 욕망이 달성되는 순간 우리는 또 다른 욕망을 찾아 나선다. 욕망은 달성되는 순간 말할 수 없는 희열을 주지만 뒤돌아서면 깊은  후회와 허무를 남기기도 한다. 우리는 이 욕망의 이끌림에 진저리 치다가도 그 욕망에 의해 다시 의욕을 갖게 된다. 우리 속의 욕망은 참으로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형태로 나타난다. 육신적 소유의 욕망, 헌신적 사랑의 욕망, 권력에의 욕망, 평온에의 욕망, 갖고 싶은 욕망, 무소유의 욕망, 인정받고 싶은 욕망, 절제하고 싶은 욕망, 머물고 싶은 욕망, 도전하고 싶은 욕망, 파괴의 욕망, 극기의 욕망, 현생의 욕망, 영생의 욕망······.

욕망은 가치판단 대상 아닌 ‘현상’일 뿐  

그렇다면 욕망은 ‘현상’인가 아니면 그 자체로 ‘선악’의 판단 대상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욕망 자체는 우리 내면에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이지 가치판단의 대상은 아니다. 즉, 욕망 자체는 -그 욕망이 어떤 종류의 욕망이든지- 선과 악, 좋고 나쁨의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욕망 자체를 막연히 또는 무의식적으로 위험한 것 또는 나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욕망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달시키고 적절한 방법으로 발현시켜야 될 ‘잠재적 에너지’로 인식하기보다 억누르고 다스려야 할 대상으로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강요되었기 때문이다. 사회적 생존을 위한 경험적 유전자가 몸에 배인 탓이다. 권력의 의도가 때로는 정의의 옷을 입고 때로는 두려움으로 내재시킨 결과이다.

앞서 나열한 욕망들의 다양성과 이율배반적 성질들을 살펴볼 때 욕망 자체는 하나의 강력한 생명에너지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모든 욕망의 근원을 찾아가면 그 뿌리는 하나이고 각각의 욕망은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사랑을 주고 싶은 욕망과 상대방을 갖고 싶은 욕망이 별개의 것일까? 하나에 몰입하고 싶은 욕망과 극한으로 절제하고 싶은 욕망의 뿌리는 다른 것일까? 사람과 사물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싶은 욕망과 자신을 헌신하고 목숨까지 버리려는 욕망의 원천은 다른 것일까?

모든 욕망의 뿌리는 하나, 선과 악으로 재단할 수 없어   

우리는 내면에 혼재하는 욕망이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수시로 꿈틀거리는 것을 느끼며 살고 있다. 거룩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다가도 일순간 불순한 욕망에 사로잡힌다. 그런 위선적이고 이중적인 욕망이 꿈틀대는 자신을 바라볼 때 무기력해지고 무가치해지는 느낌을 어찌할 것인가?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어떤 욕망에 이끌리는 사람인가? 선인인가 악인인가?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가면을 쓴 욕망이 우리의 내면에 강력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어떻게 부인한단 말인가? 우리 내면은 천사와 사탄이 싸우는 전쟁터인가? 끝없이 들끓고 용솟음치는 마그마와 같이 선 또는 악으로 단선적으로 규정할 수 없는 불가사의의 기운이 우리 속에 들끓고 있는 것은 아닌가? 누가 이런 상황에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욕망 자체를 하나의 ‘현상’으로 직시하는 의연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 속에 꿈틀거리는 욕망이 시시각각 어떤 형태의 모습으로 드러날 때 그 현상을 그대로 인정하고 의연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하겠다. 하나의 욕망이 일어날 때 어떤 부정적 느낌이 올 지라도 그 욕망이 일어나는 것 자체를 문제시하거나 죄악시해서는 안 된다. 본능적이고 자연적인 욕망의 현상에 죄책감을 갖거나 좌절하는 것은 잘못이다. 다만, 욕망이 떠오르는 순간 그 욕망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주체는 각자 스스로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 욕망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작동시킬 것인가 하는 것은 자신이 결정할 문제이다. 그리고 그 결정에 의연히 책임을 지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욕망 앞에 허둥대지 말고 직시, 선택, 책임져야    

어떤 욕망이든 욕망에 대면하기를 두려워하거나 욕망 앞에 허둥대지 말아야 한다. 그것을 찬찬히 관찰할 줄 알고, 그 실체를 인정할 줄 알고, 그리고 그것과 대화하고 공존하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그 욕망을 이해하고 다독여 주고 나아가 사랑해주어야 한다. 그런 후에야  욕망의 실체에 접근하여 깨닫게 될 것이다. 어떤 욕망에도 그 이유가 있고 그 이유가 있는 이상 그 자체를 선이나 악으로 단정할 수 없다. 더욱이 단죄해서는 안 된다. 그 욕망의 존재이유를 인정하고 자신의 정직한 욕망이 되게 유도해 주어야 한다. 그래서 남과 다른 자신만의 삶을 구성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참 욕망이 되게 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그 욕망은 하나의 ‘현상’에서 의미 있는 ‘가치’로 전환된다. 즉, 해석하고 선택하고 활용하는 자, 자신의 가치가 된다. 그 사람의 인격이 되고 삶이 된다. 자신의 삶의 가치를 결정한다.  

욕망을 직시하라. 그리고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욕망을 너의 참 욕망이 되게 하라. 그렇게 기도하라. 그러면 그 욕망이 너를 사랑할 것이다. 참 자아를 만들 것이다. 욕망이여 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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