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 묵상] “눈에는 눈, 이에는 이···비보호 좌회전”
화가 날 때, 참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분노를 속으로 삭히기만 하다간 화병이 납니다. 그렇다고 화가 나는대로 화를 낼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낼수록 더 화가 나는 것이 분노의 속성이기 때문입니다. 분노에 있어서 적당하고 적절한 선을 찾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상대가 나에게 입힌 피해 그대로 상대에게 되돌려 주고 나면 과연 분노는 가라앉을까요? 과거 남학교 같은 경우에는 학생들 사이에 주먹다짐이 꽤나 자주 있었는데요, 주먹을 한 대 맞은 쪽에서 상대방을 한 대만 때리고 끝나는 싸움을 본 적이 없습니다. 한 대 맞으면 죽도록 패주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 눈 하나를 뽑는다면 ‘나도 저 놈 눈 하나만 뽑고 잘 마무리 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그 놈의 두 눈을 뽑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더 고통스럽게 할 방법은 없을까 궁리하는 것인 보통일 것입니다.
끝을 봐야 풀리는 것이 분노입니다. 아니 끝을 봐도 좀처럼 잘 풀리지 않습니다. 결국 해결되지 않은 분노는 도를 넘어서 자기 자신이나 불특정 다수를 향하기 마련입니다.
레위기 24장 20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상처에는 상처로,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을지라 남에게 상해를 입힌 그대로 그에게 그렇게 할 것이며…”
동형보복법이나 동해보복법으로 잘 알려진 구절입니다. 이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피해를 입을 때 마다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할 명령일까요? 레위기 19장 18절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동해보복법과는 완전히 상충되는 내용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도 두 상충되는 구절을 어떻게 이해하고 적용해야 하는가가 이슈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위의 두 구절을 인용하시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손을 들어주셨습니다. 동해보복법은 보복을 적극적으로 장려하라는 명령이기보다 끝장을 보고 싶어하는 인간 분노에 대한 명확한 선 긋기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적극적으로 이행해야 할 명령은 아닌 것이죠. 교통신호로 치면 비보호 좌회전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반드시 그렇게 처벌해야할 상황이라는 공동체 전체의 판결이 전제될 때만 조심스럽고 아주 신중하게, 최소한으로 적용되어야 할 규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