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혁재의 대선 길목 D-57] 윤석열 정용진의 흘러간 노래 ‘멸공’

마트에서 장을 보고 있는 윤석열 후보

사회심리학에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이란 용어가 있습니다.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폴 데이비드 교수와 브라이언 아서 교수가 만든 말로, 일정한 경로에 의존하기 시작하면 그 경로가 비효율적이라는 걸 알아도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킵니다. 한 번 익숙해지면 그 관성 때문에 다른 방식으로 바꾸기 어려운 경향이 있다는 겁니다.

여러 상품들이 있을 때 가장 좋은 상품이 가장 많이 팔릴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뛰어나고 가성비가 좋아도 새로 나온 상품이 유통망과 인지도가 있는 상품을 제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경영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선점 우위효과(first-mover advantage)’라고 설명합니다.

최근 SNS에서 벌어지는 ‘멸공’ 논란을 보면 국민의힘 의존경로가 ‘색깔론’임이 다시 한 번 확인됩니다. 윤석열 후보는 지난해 말 지지율이 흔들리자 관성처럼 색깔론을 꺼내들었습니다. 윤 후보는 영남 지역을 찾아 문재인 정부를 향해 ‘좌익’ ‘혁명이념’ ‘북한의 주사이론’ 등으로 공격하고, “국가와 국민을 약탈하고 있다”고 소리를 높였습니다.

‘멸공논란’에 대해 윤석열 후보 측은 방역패스의 문제점을 지적하기 위해 대형마트에 가서 물건을 구매하고 이를 SNS에 올린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달파멸콩’이라는 해시태그는 구매물건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평소에 자주 먹던 식품을 구입했다는 해명이지만 ‘색깔론’에 의존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습니다.

‘멸공’논란을 불러일으킨 건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입니다. 지난해 말 정 부회장이 신상품 소개를 하면서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해시태그를 달았습니다. 그 해시태그가 문재인 정부 비판이 아니냐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습니다. 그 논란에 운석열 후보가 편승했고, 국민의힘에서 릴레이를 이어나가면서 멸공논란이 정치권으로 옮겨갔습니다.

색깔론은 우리 정치를 움직여나가는 기제(mechanism)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특히 권력자들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휘둘렀던 유용한 정치적 무기였습니다. 이승만 정권은 색깔론에 주로 의존했고, 박정희 정권 때는 여기에 지역감정과 경제성장제일주의가 보태졌습니다. 전두환·노태우 정권은 여기에 또 안정론을 추가했습니다.

분단과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색깔론 ‘레드 콤플렉스’의 힘은 매우 셉니다. ‘빨갱이’라는 말은 지우기 힘든 낙인이었습니다. 권력자가 경쟁자를 탄압하면 시민들은 탄압받는 정치인들에게 동정심을 갖게 되고, 지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탄압을 하면서 빨갱이라 낙인찍으면 시민들이 지지를 주저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신이 초대농림장관으로 임명했던 조봉암 진보당 당수를 간첩으로 몰아 사형시켰습니다. 대선 출마로 자신에게 도전했다는 괘씸죄였습니다. 5.16 쿠데타를 일으면서 ‘반공’을 강조한 박정희는 반공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짓밟았습니다. 색깔론으로 가장 많은 고통을 겪었던 정치인은 김대중 대통령입니다.

전두환 정권 때는 색깔론 때문에 현역 국회의원이 사상최초로 회기중 원내발언으로 구속(‘국시파동’)되기까지 했습니다. 유성환 의원은 대정부질의에서 “이 나라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발언했다가 ‘용공분자’로 몰리고 구속되었습니다. 야당의 대통령직선제 개헌요구로 어려움을 겪던 정부여당이 꺼내든 색깔론에 희생된 것입니다.

국민의힘과 윤석열 후보가 색깔론을 꺼내든 건 익숙하기 때문일 겁니다. 지난 날 국민의힘 계열 정권은 색깔론으로 많은 정치적 재미를 봤지만 색깔론의 힘도 예전 같지 않고, 시민들도 이제는 색깔론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색깔론은 아무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흘러간 노래입니다. 가장 익숙한 것이 가장 효율적인 것은 아닙니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