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전주비빔밥 ‘고궁’ 박병남 대표 “박병학 조리장 손맛 덕택”
“재료마다 딴 손질 거치는 고급음식, 새로운 차원의 비빔밥”
전주비빔밥 명인과 반세기 동업…2000인분 지역민과 나눠
[아시아엔=나경태 <서울대총동창신문> 기자] 주문하고 채 1분이 지나지 않아 음식이 나왔다. 타다닥 밥알 튕기는 소리와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와락 달려들어, 한 입 떠넣기도 전에 입안에 침이 고였다. 김, 버섯, 콩나물, 애호박, 고사리, 시금치 등 색색의 채소들이 돌솥을 가득 채웠고 가운데 달걀노른자와 붉은 양념장이 태극무늬처럼 나란히 놓였다. 슥슥 비벼 한 숟가락 먹고 마지막 숟가락을 뜰 때까지 밥알에서 자르르 윤기가 흘렀다. 과연 정통 전주비빔밥이었다.
지난 3월 26일 전북 전주시 고궁 본점에서 박병남 대표를 만났다.
“전주비빔밥은 음양오행에 근거한 음식입니다. 뿌리·줄기·열매·잎이 다 들어가고, 황(黃)·청(靑)·백(白)·적(赤)·흑(黑)의 오방정색이 명확히 나타나죠. 재료마다 삶고 볶고 데치고 무치는 각 과정이 별도로 들어가는, 굉장히 손이 많이 가는 음식입니다. 생나물, 생상추에 고추장 넣어 비벼 먹는 간단한 비빔밥 하고는 차원이 달라요. 비타민·단백질·무기질·지방·탄수화물 등 5대 영양소가 풍부하게 들었죠. 또한 ‘오실과’라고 해서 밤·잣·대추·은행·호두 등 다섯 가지 견과류가 가미됩니다. 다양한 재료에, 재료마다 다른 손질을 거쳐야 하니, 어지간한 집안에선 쉽게 해먹을 수 없는 양반가의 음식이죠.”
고궁만의 특장점은 또 있다. 1962년부터 전주비빔밥 외길을 걸어온 박병학 명장이 주방장을 맡고 있다. 박병남 대표와 이름이 비슷해 종종 형제로 오해 받지만, 가족관계는 아니다. 그러나 전주비빔밥의 전통 계승과 발전에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친형제 못지않게 끈끈하다.
2003년 전주풍남제와 2004년 전주시민의 날 행사 때 1000인분 전주비빔밥 이벤트를 함께 개최해 국내는 물론 해외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박병학 조리장의 요리 입문 50주년 땐 2000인분 비빔밥을 만들어 지역주민과 소외계층과 나눴다. 두 사람의 인연은 197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등학교 졸업할 즈음 부모님 권유로 누나와 매형이 운영하던 식당에 취업했습니다. 출근 첫날 우연히, 한 손님이 박 명장님을 따라가며 정말 잘 먹었다고 인사하는 것을 봤어요. 요리로 감동을 준다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죠. 전국 각지의 미식가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여드는 걸 보면서 어린 나이지만, 외식업 최고 권위자가 되겠다는 꿈을 갖게 됐습니다. 아버지가 쌀을, 어머니가 콩나물을 팔았던 장사꾼의 피를 이어받아서인지 적성에도 잘 맞고 내 인생 모두를 여기 걸어도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어요. 7년 만에 매형의 식당을 물려받아 운영하다가 1996년 박병학 명장님과 함께 이곳 고궁을 차려 독립했죠.”
박병남 대표는 식당 경영을 종합예술에 비유했다. 생산 측면에서 좋은 식재료와 알맞은 레시피를 찾아 연구하고, 매장 운영과 관련해선 법률 지식도 필요하며, 고객 및 직원 관리 측면에선 대인관계도 능숙해야 하고, 때론 시장에서 장보는 주부처럼 흥정도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영인으로서 박 대표는 고궁을 프랜차이즈화했다. 명인의 식감과 재료 선별능력을 매뉴얼로 정립시켜 전국 어디서든 고궁의 전주비빔밥을 맛볼 수 있게 심혈을 기울였다. 서울 명동점을 비롯해 코엑스, 고속터미널 등 전국 50여 곳에 식당을 열었다.
“서울 명동점을 열 때 서울대 식품및외식산업보건 최고경영자과정(AMPFRI)을 나오는 덕분에 서울대 동문들 도움이 컸습니다. 외국인 관광객에게 한국의 정통 음식을 선보이는 명소로 자리잡았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문을 닫았어요. 다른 매장도 다 정리했죠. 50년 외식 사업에 종사하는 동안 숱한 위기를 이겨냈습니다. 어려울 땐 직원들이 자진해서 돌아가며 휴직을 했어요. 저와 직원들 모두 한마음 한뜻으로 뭉쳤기에 버틸 수 있었죠. 매출이 30% 가까이 줄 때도 포장이나 배달은 하지 않았습니다. 품질관리 때문이죠. 갓 조리됐을 때 먹어야 제맛인 전주비빔밥을 당장의 이익을 좇아 훼손시킨다면 장기적으로 이미지가 실추될 게 뻔했어요.”
반세기 넘게 정통 전주비빔밥의 참맛을 지켜온 박병남 대표. 올해 고희를 맞은 그는 후대에도 온전히 그 맛을 이어가기 위해 아들(박지훈)에게 가업 승계를 하고 있다. 지훈씨가 미국 CIA(the Culinary Institute of America) 요리학교의 2년 정규과정을 1년 6개월 만에 마쳤다며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선진 외식 사업의 문화와 시스템에 한국 전통 음식을 결합하면 그 시너지 효과가 굉장할 것”이라고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10년 전 아들이 결혼할 때 저희 과정 주임교수셨던 이승욱(서울대 수의학 67-71) 보건대학원 명예교수님이 주례를 서주셨습니다. AMPFRI과정 동창회의 정신적 지주 같은 분이셨죠. 저는 1998년 수료 후 8대 동창회장을 지냈고요. 최근 배출된 동문들과의 교류는 뜸하지만, 동창회에 큰 행사가 있을 때 먼 길 마다지 않고 참석합니다. 동문이 운영하는 유명 식당을 2박 3일 일정으로 탐방하며, 그들의 경영 철학이나 맛의 비결에 대해 들었던 게 기억에 남아요. AMPFR과정에 훌륭한 동문이 참 많더군요. 외식산업이 무척 힘든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주저앉을 순 없잖아요. 미래를 잘 내다보고 열심히 일한다면 더 나은 오늘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