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란의 히트곡 ‘동숙의 노래’와 한 여공의 비극

“한산도 선생이 사연을 노랫말로, 백영호 선생이 작곡을 하여 1966년 신인가수 문주란이 동숙의 노래로 데뷔했다. 그때 문주란 나이는 10대를 벗어나지 않은 앳된 소녀였다. 히트, 대히트였다.”(본문 가운데) 사진은 문주란 제1집 동숙의 노래 레코드. 

한때 우리 가슴을 슬프게 했던 ‘동숙의 노래’가 있다. 그 때는 누구나 어려운 생활을 면치 못했다. 당시 외국 한번 나가려면 여권 내기도 어려웠고, 외국에서 권투선수를 초청해 1만달러를 지불하려 해도 한국은행에서 외환허가를 받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1960년대,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동숙은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한 채, 서울에 올라와 구로공단 가발공장에 다니고 있었다. 월급은 최소한의 생활비만 남기고 시골 부모님에게 모두 내려 보냈다. 동생들 학비와 가사에 보태려는 것이었다. 그러기를 십여 년, 가난했던 시골집 생활이 조금 나아졌다.

문득 자신을 돌아보았으나, 그녀는 서른이 가까와 노처녀 나이로 지나간 세월이 너무도 아쉬웠다. 그때부터 자신을 위해 투자하기로 결심한 그녀는 검정고시 준비를 했다. 대학에 들어가 글을 가르치는 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종로에 있는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하고, 정말 열심히 공부하여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

그러던 그에게 변화가 생겨 학원의 총각선생님을 사모하게 된다. 착하고 순진한 동숙은 자취방까지 찾아가 선생님 밥도 해주고 옷을 빨아주며 행복을 느꼈다. 장래를 약속하며 몸과 마음, 그리고 돈까지 그에게 모두 바쳤다. 그런데 가발공장은 전자산업에 밀려서 감원과 부도로 그는 직장을 잃고, 학원비를 못내 학원도 나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할 수 없이 부모님 도움을 얻으려고 시골에 내려갔다. 그리고 공부를 하겠다고 부모님에게 돈을 요구했다. 부모님은 “야야, 여자가 공부는 무신 공부냐? 집에 있다가 시집이나 가그라.” 10년 동안 가족을 위해 희생했던 동숙에겐 부모님이 너무 서운했다.

그녀는 부모님을 원망하며 울면서 서울로 돌아온다. 그녀를 만난 친구들은 동숙에게 “박 선생 약혼자도 있고 이번에 결혼한다더라. 순전히 느그를 등쳐먹은 기라, 가시나야…” 동숙은 사실이 아니기를 바랐고, 그를 만나서 확인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그 남자는 마음이 싸늘했다. “너와 난 학생과 제자야. 내가 어떻게… 그리고 네가 좋아서 날 따라다녔지. 고등학교 검정고시나 잘 보라구…” “알았씸더 예…” 더 이상 긴 이야기가 필요 없었다. 농락당한 것을 알게 된 동숙은 복수를 결심한다.

동생들과 부모님에게 희생만 당하고 그렇게 살아 온 동숙은 “어차피 내 인생은 이런 거야” 하며 절망한다. 그녀는 동대문시장에서 비수를 하나 사서 가슴에 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수업시간, 선생이 칠판에 필기를 막 쓰고 돌아서려는 찰나, 동숙은 선생님 가슴에 복수의 칼을 꼽았다.

“야 이 나쁜 놈….” 순간적인 일이었다. 비명소리에 쓰러지고, 학생들과 교무실에서 선생들이 달려오며, 결국 동숙은 경찰에 잡히고 만다. 경찰 조사를 받으면서도 동숙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어찌 되었어요? 잘못 했어요. 형사님! 제발 선생님만 살려주세요.”

자신을 탓하면서 선생님 안부를 더 걱정하지만, 동숙은 결국 살인미수죄로 복역하게 된다. 가난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오직 가족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그녀가 뒤늦게 얻은 사랑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동숙의 살인미수라는 비극으로 마무리한 ‘사랑의 생활수기’가 여성 주간지에 실렸었다. 그 수기가 당시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고 그녀를 모델로 하여 영화와 ‘동숙의 노래’도 만들어졌다. 한산도 선생이 사연을 노랫말로, 백영호 선생이 작곡을 하여 1966년 신인가수 문주란이 동숙의 노래로 데뷔했다. 그때 문주란 나이는 10대를 벗어나지 않은 앳된 소녀였다. 히트, 대히트였다.

가사는 다음과 같다.

너무나도 그님을 사랑했기에
그리움이 변해서 사무친 마음
원한 맺힌 마음에 잘못 생각에
돌이킬 수 없는 죄 저질러 놓고
흐느끼면서 울어도 때는 늦으리
때는 늦으리.

님을 따라 가고픈 마음이건만
그대 따라 못가는 서러운 마음
저주 받은 운명이 끝나는 순간
임의 품에 안긴 짧은 행복에
참을 수 없이 흐르는 뜨거운 눈물~
뜨거운 눈물~

찢어지게 가난했던 우리의 60년대. 당시 우리의 많은 10대 여공들은 배우지 못한 서러움과 냉대 속에 동숙과 같은 삶을 살아야만 했던 숙명이었을 것이다.

1960~80년대에는 남자는 독일광부, 월남전 파견, 중동 건설현장 파견 등으로 외화를 벌어들이고, 여자들은 독일간호사 파견과 전국의 공단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가족을 먹여 살리고, 자식들이나 동생들 공부시켜가며,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공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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