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입대 앞둔 이동순에 김명인 시인 “어떤 고난도 시련도 모두 시의 훌륭한 재료”
[아시아엔=이동순 시인, 영남대 명예교수] 우리 문단에는 김명인이란 이름이 둘 있다. 하나는 비평가, 다른 하나는 시인이다. 오늘은 시인 김명인에 대한 추억담이다.
그분은 1973년 중앙일보신춘문예로 시 ‘출항제’가 당선되어 등단했다. 경북 울진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과 출신이다. 같은 해 신춘문예 당선자들과 ‘1973’ 동인과 ‘반시’ 동인을 할 때 같이 했다.
굵은 뿔테 안경으로 과묵하고 투박해 보이지만 뜻밖에 자상하고 다정한 성품이 많다. 1975년 내가 군 입대를 앞두고 심란해서 전국을 공연히 주유천하하던 때 우연히 만난 김 시인에게 손목을 잡혀 중랑교 옆 면목동 댁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그날 밤 김 시인은 당신의 군 시절을 회고하며 시인에게는 어떤 고난도 시련도 모두 시의 비옥하고 훌륭한 재료가 되니 힘든 군 생활을 잘 돌파하라는 뜻깊은 조언과 충고를 들려주었다.
김 시인은 월남전 참전 맹호부대 병사로 동두천 테마 연작시를 써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날 밤 새벽 두 시까지 도란도란 인생후배를 위해 유익한 얘기를 들려주던 김 시인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그후 시인은 ‘문학과 지성’ 멤버가 되었고 나는 창비 쪽에서 활동하며 서로 만나는 일도 뜸하게 되었다.
우리 문단에서는 아주 야릇하게도 각각 노는 물이 다르면 서로 친밀하게 어울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그래도 김 시인과는 옛 정이 있어 서로의 근황도 전하고 발간하는 책도 나눈다.
1987년 내가 <백석시전집>을 준비할 때 한 편이라도 더 찾아서 넣으려고 동분서주 쏘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김 시인은 나보다 먼저 백석 시에 주목하고 논문을 써서 발표한 경력이 있는지라 내가 미처 찾아내지 못한 백석 시의 목록을 적어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뜻밖에도 백석의 시 ‘球場路-西行詩抄’를 비롯한 두 세 작품의 복사본을 보내주어서 시전집 발간에 큰 도움을 받았다.
그 특별한 관심과 배려를 어찌 잊으리. 지금은 서로 연락이 뜸한지 오래지만 추억 속에서 그 우정은 영원하다.
1990년대 초반으로 기억되는데 서울에서 내려온 황동규, 조정권, 하응백 등과 마산에서 올라온 박태일 시인, 대구의 문인수, 이하석, 송재학 등과 어울려 울진의 김 시인 생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노모께서 울진 옛집을 혼자 지키고 계셨는데 독실한 기독교인이셨다. 늘 성경을 끼고 노년의 고독한 삶을 보내셨다. 김 시인이 어릴 때 살던 작은 골방에서 서로 무릎을 맞대고 비좁게 앉아 동해의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그 밤을 즐기던 풍경들도 떠오른다. 집 뒤로는 해풍을 막는 대밭이 있었고 작은 쪽문을 여니 바로 파도소리가 들렸다.
박태일은 자신이 존경하던 황동규 시인의 말을 혹시라도 놓칠 새라 녹음기를 꺼내놓고 낱낱이 녹음하던 장면도 생각이 난다.
‘영동행각’이라는 김명인의 시에서 동해안 성장기의 실루엣을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언제나 시의 본질을 뜨겁게 껴안고 진지하게 살아가야 한다며 그 초심을 잃지 않아야 시인”이라는 의미 있는 충고를 들려준 선배.
한참 못 만났는데 잘 계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