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여권시대(女權時代)”···꼭 기억해야 할 그들

1970년대 구로공단 가발공장에서 여성노동자(당시는 여공으로 통칭됐다)들이 일하는 모습 <사진 연합뉴스>

“지금은 여권시대(女權時代).” 요즘은 남성이 다소 움츠려들고 아내들 권력이 세져 당당하기조차 하다. 나쁜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를 만들기 위해 1980년대만 해도 여성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여성들의 투쟁이 생각난다. 1979년 8월 11일, 가발‧봉제업체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87명은 회사측의 일방적인 폐업조치 및 해고에 맞서 당시 야당이던 마포 신민당 당사 4층으로 옮겨 농성 중이었다. 경찰의 강제진압으로 동료들이 짓밟히고 짐짝처럼 끌려 나가는 과정에서 항거하던 김경숙 YH노조 조직차장이 목숨을 잃었다.

왼쪽 동맥이 끊기고 타박상을 입은 채 당사 뒤편 지하실 입구 시멘트 바닥에 쓰러져 있던 그를 발견하고 인근 병원으로 옮겼으나 끝내 숨졌다. 이 사건은 10월 4일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의 의원직 제명, 10월 16일~20일의 부마항쟁,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10‧26사태)으로 숨 가쁘게 이어지면서 18년 박정희 독재체제 종식의 도화선이 됐다.

지금도 을지로 중소기업빌딩 앞에는 ‘企業人天下之大本’이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농자천하지대본’이던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혁명적인 변천을 했는지 알리는 현장이다. ‘기업인’ 이란 명패 앞에 ‘사농공상’의 신분 서열도 완전히 뒤집혔다. 이렇게 기업이 ‘천하지대본’이 되기까지, 지난 세월 속에는 잊혀진 세 여자 ‘순이’의 이름이 있다.

당시 식모, 여공, 버스안내양이 ‘삼순이’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겪은 고난은 우리 현대사 이면에 설움으로 기록돼 있다. 반세기만에 나라가 기적 같은 발전을 거듭하는 동안, 함께 땀 흘리고도 우리들 기억에서 한발짝 떨어져 있는 여성들이다. 우리는 그들을 식순이, 공순이, 차순이라고 불렀다.

이름에 뒤에 붙인 ‘착할 순(順)’자처럼 시키는 일에 순종하고 늘 조연의 삶을 살면서 자신을 낮춰보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저널리스트 정찬일씨가 펴낸 <삼순이>는 그 시대를 다시 재현한 묵직한 서술 더미다.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해 1950년대부터 80년대까지 삼순이의 한 시대를 복원했다.

우리가 겪어온 이야기인데도 곳곳에서 가슴 뭉클해지는 장면과 마주친다. 그 시절의 풍경이 슬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며, 아련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식모→식순이→가정부→가사도우미로의 변천은 일제 강점기에 등장한 식모란 이름에서 비롯된다. 일본 가정은 한국 가정보다 임금이 두 배 많은 데다 인간적인 대우도 해주어 여성이 선호하는 일자리가 되었었다. 그런데 그 식모 일자리가 위기를 맞은 것은 해방이 되면서였고, 6.25로 전쟁고아가 쏟아진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먹여주고 재워만 달라는 시절엔 판자촌 셋방을 살아도 식모를 둘 정도였다. 당시 식모는 시골에서 상경한 소녀의 첫 직장이었다. 이를 발판으로 공장, 버스회사, 미용실 등으로 지경을 넓혔다. 이중에도 버스 차장은 여성 일자리가 귀한 때에 임금도 상대적으로 높아 일등 신붓감으로 꼽혔다.

1970년대 버스 차장.

그러나 하루 18시간을 콩나물버스에 시달리고 잠은 4시간밖에 못자는 중 노동자였다. 각성제를 입에 달고 살았고, 너무 오래 서 있다 보니 이런저런 질병에 시달려야 했다. 승객과 요금 시비를 벌이다 폭행을 당하기도 하고 달리는 버스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는 사고가 빈번했다.

10대 소녀가 많았던 안내양의 급여 사용처가 그들의 고단한 삶을 일러준다. 수입의 65%가 부모 생활비와 형제 학비로, 자신이 쓴 용돈으로는 3% 안팎에 불과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동생들에게 먹을 것을 사주며 “이 순간처럼 땀 흘린 보람을 느낀 적은 없다“고 말했던 그들이다. 못 배운 한을 풀려는 노력도 눈물겨웠다.

이틀 일하고 하루 쉴 때를 이용해 검정고시 학원에 다니는 학구파가 많아 해마다 검정고시 합격자 수로 경쟁하는 버스 회사의 새 풍속을 만들기도 했다. 임금이 줄어든다고 정부의 격일제 근무를 반대했던 그녀들이다. 그렇게 번 돈으로 공부도 하고 집안을 살렸다.

70년대 들어 각광을 받은 직장은 공단이다. 버스회사에서 이직한 여성들이 찾는 곳이었다. 급여와 근무 여건이 좋고 산업체 부설학교가 세워진 것도 매력적이었다. 1967년 구로공단을 찾은 박정희 대통령이 어린 여공에게 소원을 묻자 “또래처럼 교복 한번 입어보고 싶어요”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감정에 북받친 박 대통령이 소녀들 앞에서 이렇게 지시한다. “법을 뜯어고치든, 절차를 바꾸든 공단 아이들에게 똑같은 배움의 기회를 주라.” 그렇게 해서 등장한 것이 산업체 부설학교였다.

이같은 여성들의 땀과 눈물이 켜켜이 쌓여 오늘날 위풍도 당당한 여권시대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들의 근면과 희생을 빼고 대한민국이 이룬 성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 여권이 너무 지나쳐 상대적으로 작아지는 남성들 권위는 누가 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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