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웅산 수치 연금, 미얀마 쿠데타를 보는 눈
미얀마에서 또 쿠데타가 발생해 아웅산 수치 국가고문이 연금되었다. 미국은 미얀마라 부르지 않고 1968년 쿠데타 이전의 국호 버마를 고집하고 있다.
아웅산 수치는 김대중 정부 시절 필리핀의 아키노와 함께 한국에도 온 적이 있다. 인도와 버마는 영국의 식민지로 하나로 연결되었는데 버마는 68만㎢로 한반도의 세배를 넘는다.
영국 통치하에서 버마는 동남아에서 최대 쌀 수출국이었다. 우누의 버마식 사회주의 아래 버마는 동남아 최빈국으로 전락하였다. 사회주의가 나라를 망해먹은 대표적인 나라였다. 우누 이래 네 윈의 쿠데타가 있었고 그 후에도 몇 번의 쿠데타가 있었는데 이번에 다시 쿠데타를 만난 것이다. 민정이양을 했다 하나 의회의 25%는 군부가 장악한다는 불완전한 것이었다.
미얀마는 태국과 비교가 된다. 버마는 한때 태국도 지배한 강국이었다. 그러나 태국은 영화 <왕과 나>에 나오듯이 일찍부터 근대화를 이룩했다. 2차대전 후 SEATO의 일원이 되었으며 베트남전에도 참전, 미국을 지원했고 오늘날에도 상당한 중견국가이다.
버마는 불교의 나라다. 스스로를 ‘황금의 나라’라고 부른다. 세다곤탑은 높이 400m가 넘으며 5천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 사원이 수천개가 넘는다. 이는 버마가 번영하던 나라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전두환 대통령의 버마 방문 시 아웅산묘지 폭파가 있었다. 김재익 등 국가 인재들이 순국했다. 이기백 합참의장은 간발의 차로 화를 피하고 부관의 분투로 구출되었다. 격노한 버마는 북한에 대한 국가승인을 취소했다.
아웅산 수치가 버마에 민주주의를 회복했지만 경제회복은 하지 못했다. 민주화에 공헌은 했지만 국가 운영에 실패한 예로서 남는다.
버마는 태국과 같이 경제적으로 올라설 수 있는 바탕을 가졌는데도 정치 지도력에 따라 명암이 갈리고 있는 대표적 사례다. 버마의 엘리트는 영국 옥스퍼드, 캠브리지에서 교육 받는다. 수치도 옥스퍼드대학 출신이며 남편은 영국인이다.
지금 중국은 버마와 연결하여 인도양으로 진출하려 한다. 중동 석유를 파이프라인을 이용하여 인도양에서 운남성雲南省으로 연결하면 석유를 수요의 절반 밖에 보유하지 못한 중국으로서는 국가해상 실크로드의 일대일로一帶一路가 완성된다.
2차대전 시절 연합국이 만달레이에서 출발하여 중국과 연결하던 수송로의 재판이다. 중국 견제를 21세기 국가전략으로 삼는 미국으로서는 버마가 중요하다. 때문에 버마 쿠데타 비판이 단순히 민주주의 옹호를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주요 관심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아웅산 수치는 미국보다 영국이 관심을 갖는다. 버마는 아시아에서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기반이고, 스리랑카, 방글라데시는 인도와 더불어 영국 영향권이었으므로 영국이 한 역할을 하려 한다. 자원 부국인 버마에 우리 기업도 상당히 진출해있다.
버마가 민주화 도정에 겪는 애로를 극복하여 순탄한 발전을 이루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