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드레서’ 노배우 송승환에게 아낌없는 갈채를

송승환씨

몇년 전 갑자기 오른 쪽 눈에 피가 나면서 보이질 않았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병원엘 못 가고 원불교 여의도교당으로 향했다. 법회가 생명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일원대도(一圓大道)에 귀의한 그날부터 303번 읽어온 <원불교전서>의 독송(讀誦)을 더 이상 못하게 되었다.

2018년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과 ‘난타’ 제작으로 유명한 배우 송승환을 모르는 분은 없을 것이다. 송승환은 지난 11월 18일 개막한 ‘2020 정동극장 연극시리즈-더 드레서(THE DRESSER)’의 무대에 섰다. 송승환은 배우로 불리길 원하지 않았다.

그는 교수·연출가·문화제작자로 더 많이 불리기를 원했다. 그의 망막 시세포가 가운데부터 죽어가기 시작했다. 시력장애인 사시(斜視)가 되었다. 그는 지금 시력을 잃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송승환이 필생의 작업인 동계올림픽 개·폐회식 총감독을 무사히 끝낸 직후였다.

처음엔 과로 때문인가 했다. 아니었다. 휴식도 소용없었다. 그는 어두워가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붙잡으려 매달렸다. 세상의 내로라하는 의사들을 다 찾아다녔다. 그가 들은 답은 “알 수 없다”는 한마디였다. 원인도, 치료법도 모른다.

더 드레서 출연진. 오른쪽 4번째가 송승환씨

제일 답답한 건 “언제 완전히 세상이 닫힐지, 그 날짜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대체의학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있었다고도 했다. 사실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렸던 것이다. “그것마저 안 하면 할 게 없어서”라고 했다.

세상 누구나 아는 유명인이라 더 힘들다고 한다. 사람을 알아보지 못해 먼저 인사할 수 없다. 그는 핸드폰 글자를 키우는 법이며, e-메일을 음성으로 듣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케이블TV로 영화를 보고 싶은데 요즘은 더빙 영화가 별로 없다며, KT에 민원을 넣어야 하겠다고도 했다.

그는 지금 한 가지 소원이 생겼다고 했다. 자기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무대에 꼭 한번만 다시 설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세상의 빛과 멀어져 가는 순간에도 그는 여전히 밝았다.

그의 염원이 하늘에 닿았던지 이번 정동극장 무대에 섰다. 연극 ‘더 드레서’의 노(老)배우 역을 열연하고 있는 중이다. 다시는 설 수 없을 줄 알았던 무대여서였을까? 손짓·발짓·몸짓 하나하나 혼신의 힘이 담긴 듯했다.

무대는 1942년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이던 영국 런던. 독일군 공습으로 시민의 삶은 혼란과 암울뿐이던 시절, 포화 속에도 이어진 연극 공연이 그나마 위안거리였다. 삼류극단의 극단주인 노배우는 “살면서 처음으로 미래가 나한테서 도망쳐버린” 그날, 마지막 혼신의 연기를 하고 죽음을 맞는다.

“가끔 내 얘길 해줘. 배우는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니까”라는 독백을 한다. 송승환은 이미 어쩌면 자신의 마지막 무대가 될지도 모를 작품으로 이것을 골랐을 것 같다. 그는 시력이 좋아져서 무대에 다시 선 게 아니다. 어느 날 시력 악화가 멈췄다. 지난해 말이었다.

그에겐 기적 같았다. 매일 작아져 가던 세상이 더는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로 충분하다고 했다. 공연이 끝나고 커튼콜에서 그는 잠시 울먹였다. 그는 “다시 못 설 줄 알았던 무대에 다시 서게 됐다” “여러분의 염려와 기도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고 했다.

연극 속 대사 “이 암울한 세상, 힘든 시절을 버티고 버텨서 여기까지 왔다”고 말할 땐 ‘견디고 또 견뎌낸 세월’이 고스란히 묻어난 것 같았다. 어쩌면 지금이 그에겐 인생 최악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개인뿐 아니다. 그의 회사(PMC 프로덕션)도 버티기에 들어갔다고 한다.

1997년부터 이어 온 난타공연도 올 초 중단했다. 그런 그가 독일군의 공습에 떠는 공포의 세상을 무대에 불러낸 것이다. “포연 속에서도 쇼는 계속돼야 한다”고 절규한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떨고 있는 요즘 세상은 그때의 공포를 실시간으로 소환한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쇼는 계속돼야 한다. 그렇게 그는 이 힘든 세상, 암울한 시절에 자신의 길에서 살아가는 법, 살아남는 법을 세상에 전하고 있다.

우리의 눈앞에 흐르는 진리는 ‘음양상승’(陰陽相乘)의 도(道)다. 고난 없이 인생을 성공으로 이끌 수 없다.

고난을 외면하면서 성공하려고 발버둥할 때, 실패의 늪에 빠져서 더욱 힘들어 할 것이다. 견디고 살아낸 세월, 우리 명배우 송승환님이 마지막까지 견뎌내길 함께 기원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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